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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익는 집 1 > 이용옥

율리안나 2016. 9. 24. 00:39

술 익는 집 1
이용옥

이즈음이면 아버지는 풀기 센 모시 중의 적삼에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중절모에 단장을 든 채 길을 나서셨다. 목련꽃빛 세모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뒷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문 밖까지 배웅 나온 식솔들 낯빛은 그의 차림새만큼 밝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출연할 낯선 이에 대한 마뜩치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아버지의 귀갓길은 범상치 않았다. 일차 전령 아재에 의하면 아버지가 저수지 아래 오시는데 많이 취하셨음에도 다시 주막으로 들어가시더란다. 식구들 얼굴에 구름이 낀다. 두어 시간 후 육촌 오빠 말이 너무 취해 자전거에 모시지 못하고 짐만 가져 왔노라며 장꾸러미를 전한다. 더해지는 먹구름…. 이쯤 되면 큰오라버니는 암소 등에 질마를 얹어 달구지를 꾸몄다. 그리고 말없이 소달구지를 끌고 나가면 또 다른 오빠 하나가 뒤를 따랐다.
때론 인사불성으로, 어느 기분 좋은 날은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수없이 되뇌시면서, 또 언젠가는 분기탱천의 격앙된 삿대질로 달구지에 실려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침의 그 멋스런 선비가 아니었다. 세모시 결 고운 두루마기는 사정없이 구겨지고, 목련꽃빛 중의의 무르팍은 진흙으로 얼룩덜룩, 찌그러진 중절모를 허리춤에 깐 형상은 옷감의 종류, 출타의 이유와 장소만 달랐을 뿐 일 년에 서너 번씩 연출하던 황당한 모습이었다. 술이 좋아 그냥 드시면 인사불성, 뜻 맞는 친구와 교우이신(交友以信) 하며 기분 좋게 마시면 유붕자원방래, 하 수상한 시절이 심기를 거슬러 울분 토하며 드신 날은 분기탱천, 음주의 이유도 결과의 양상도 다양했다.
예산군 오가면 안동 김씨 가에 참한 규수가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반듯한 용모, 예의범절 깍듯하고 손끝 야문 둘째 딸은 근동에 장성한 아들 가진 사람은 모두 탐내는 아리따운 처자였다.
중신아비 두어 번 발걸음에 전주 이씨 가(家)에서 온 사주단자. 초례청에서 처음 본 신랑의 장대한 기골과 부리부리한 눈빛은 수줍은 신부의 발그레한 얼굴을 원삼 자락 더 깊숙이 숨어들게 했다.
“하이고, 그 새댁 곱기도 하다!”
교꾼들 쉬는 사이에 들춰 본 가마 속 새 신부는 복사꽃 같이 화사하고 함박꽃 같이 탐스러워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종조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 어여뻤던 어머니의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채색되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신 술 한 잔이 어머니의 흰머리 한 올로 변하는 공식이라도 있는 것만 같았다.
“어른이 바깥일 하시려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버지의 과음에 대해 누군가가 두런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이렇게 일축해 버리셨다. 행여 아버지의 권위에 흠집이라도 날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지나친 실수라도 한 다음엔 아무도 듣지 않는 한밤중에 엄중히 닦달하여 몇 달 간 술을 끊게도 하셨다. 그럴 땐 아버지 스스로 단주를 공표하는 듯 말씀 하셨는데 부모님과 같은 방을 쓰던 어린 나는 알았다. 그것이 어머니 베갯머리송사의 결과라는 것을.
이상한 것은 그 어려운 금주의 율을 깨게 하는 것은 늘 어머니였다. 서너 달이 지나면 어머니는 또 한 말의 쌀을 불려 시루에 찌고 천정에 감춰 둔 누룩을 끄집어내 술을 안치셨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면 “네 아버지 쓸쓸해 보여 안 되겠다.”가 답이었다. 어머니의 술 한 잔을 마신 아버지는 가뭄에 말라가던 초목이 소낙비에 목을 축인 듯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술 먹는 신랑 만나면 절대 안 된다고 단단히 오금을 박으셨다.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의 애정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답하시곤 했다. 어느 날 장에 갔던 아버지는 먼저 볼일 끝내 돌아오는 사람을 시켜 달구지를 보내라 하셨다. 또 취하셨나 하며 걱정스런 발길로 약속의 장소로 간 오빠는 소년처럼 들떠있는 색다른 아버지를 만났다. “네 어머니 드리려 샀다.”는 말과 함께 내보인 것은 ‘부라더미싱’이었다.
얼마 전 서울로 나가 돈 잘 버는 당숙이 종조할머니에게 사 보낸 재봉틀을 부러워하던 어머니를 잊지 않은 선물이었다. 한복감까지 함께 끊어 오신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 얼굴에선 한 동안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부라더미싱으로 처음 지은 옥색 한복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끼는 외출복이 되었다.
소달구지가 경운기로, 소형트럭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그 소중했던 재봉틀이 헛간 구석으로 밀려나며, 말술을 마다않던 아버지의 꼿꼿한 허리도 구부정해졌다. 형제들이 각자 짝을 찾아 떠난 빈 집은 말 없는 두 노인네와 귀 어둔 텔레비전 소리만 드높았다. 그 과정에도 변치 않는 한 가지는 그 집 어딘가에는 아버지를 위한 동동주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분 중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셨다. 신부전 말기로 수술과 혈액 투석 외엔 방법이 없다는 의료진의 설명에 어떤 자식도 해보마고 대답을 못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만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집 팔고 논 팔아 병원 주변에 집 한 채 마련 해 병수발을 들겠노라고. 그건 충격이었다. 선영과 종가를 목숨처럼 여기던 아버지가 어머니만을 위해 유업을 정리하겠다는 것은 심프슨 부인을 위해 왕위를 버리겠다는 에드워드 8세의 선언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삼십삼 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수척할 대로 수척하여 수술마저 보류되던 사이 어머니는 입은 옷 벗듯 한 줌의 육신만 남겨놓고 이승을 떠나셨다.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반 쯤 넋이 빠지신 아버지는 어머니가 남겨놓은 마지막 술에 그리움과 회한을 담아,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담아 마시고 또 마셨다.
어머니는 볕 잘 드는 작은 동산에 새 둥지를 트셨다.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아 당신 발자국만으로 동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만들었다. 그의 엄격한 관리로 산소엔 잡초 한 포기 자랄 수 없었고, 봉분을 뒤덮은 푸른 잔디는 금방 이발한 아이의 상고머리처럼 윤기가 났다.
그러길 삼 년. 어머니의 세 번째 제사를 나흘 남겨두고 아버지도 이승을 떠나셨다. 싱거운 양조장 막걸리가 끝내 비위에 맞지 않으셨던 듯, 칼칼한 어머니의 동동주가 못내 그리우셨던 듯. 그 날도 어머니 가셨던 그 밤처럼 매화꽃잎 같은 첫눈이 내렸다. 그러나 눈은 오래지 않아 그치고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밤새 어둔 하늘을 비추었다. 그 별빛은 앉아 기다릴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동구까지 마중 나와 밝혀둔 간절한 기다림의 불빛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