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제 빛깔에 물든다
장금식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중심으로-
파리에서 니스 행 고속열차를 탔다. 칸, 니스, 모나코, 리비에라 해안이 가까워진다. 니스 역 이름이 보이자 지중해의 푸른 물결이 금방이라도 밀려올 것 같다. 칸에서 때 아닌 영화제를 볼 것 같기도 하다. 니스의 자갈해변을 바라보며 ‘영국인들의 산책로’를 걷고 싶은 마음에 발은 벌써 그곳에 가 있다. 모나코에선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주연했던 영화도 볼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은 여행자의 자유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와즈 사강(Francoise Sagan1935~2004). 그녀의 『슬픔이여 안녕』, 소설 배경지 칸은 니스에서 멀지 않다. 숙소에 짐을 풀고 마세나 광장에서 칸으로 가는 200번 버스를 탔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모를 작가가 어떻게 슬픔의 소재를 캐내어 슬픔의 언어를 풀어 쓰고 슬픈 감정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잘 묘사했을까.
1시간 반 정도 지나니 드디어 칸이다. ‘슬픔’의 대지는 어떨까. 축축할까. 건조할까. 물렁할지 단단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소설 속 다섯 인물들이 황갈색 모래해변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파리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17세 소녀 세실. 바람기가 있고 자유분방한 아버지 레이몽. 지성과 감성, 품격과 외모까지 겸비한 세실 어머니의 친구 안느. 아버지 애인으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엘자. 세실 남자친구 씨릴.
나는 지금 모래 한줌을 만지면서 등장인물 중 누구의 슬픔을 닦아주고 어루만져 줘야하는지 그 무게에 저울질 해본다. 세실이 씨릴과 사랑을 나누었던 곳도 이 모래사장이고, 안느와 내적 갈등으로 인해 모래 위에 엎드리고 뺨을 갖다 대던 곳도 바로 이 해변이었지. 세실의 슬픔으로 무게가 기운다. 숱한 모래가 먼먼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슬픔의 방식, 그 속살을 드러내려는 것 같은데. 아니, 왼쪽해변에 도열해있는 저 요트들은 먼 바다를 즐길 채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희비의 감정이 엇갈린다. 씨릴과 세실이 저 요트를 타고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세실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여름 휴양지에서 아버지가 안느와 재혼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유 없이 거부감을 가졌어. 안느가 싫은데 어쩌지. 씨릴과 엘자를 이용하여 아버지의 재혼을 방해할 작전이라도 꾸며야 하나. 아버지 앞에서 씨릴과 엘자가 연인관계인 척 해주면 좋겠는데. 엘자에 대한 아버지의 질투심을 유발시키면 내 연극은 성공이야. 아버지는 내 작전에 휘말릴 게야. 안느와 결혼 약속을 깨고 엘자와 다시 애정관계를 회복하겠지. 둘의 애정행위를 목격한 안느는 배신감과 상처를 받고 별장을 떠나고 말거야. 그래도 아버지를 사랑한 만큼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게야. 맙소사! 별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하다니. 내가 꾸민 일이라도 너무 끔찍한 결과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춘기 소녀의 반항어린 성장소설 같은 인상을 준다. 발칙한 상상력과 무모한 가혹함이 담겨있다. 통속소설 같다고 해서 평가절하는 할 수 없다. 18세 젊은 사강은 이 작품에서 뛰어난 심리묘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처녀작을 발표하자 베스트셀러가 되며 비평가 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무리 천재성이 있다 해도 어떻게 18세에 이런 글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을 의도하진 않았을 게야. 소설 배경지에 와보니 슬픔의 실루엣이 저 멀리 수평선까지 펼쳐진다.
왜 세실은 새어머니가 될 안느를 거부했을까? 고상하고 우아한 정신세계를 삶의 바탕으로 여기는 안느와 쾌락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자신이 비교되어서? 이성의 부모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남자 아이가 어머니에게 가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자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엘렉트라 콤플렉스. 혹시 세실이 새어머니가 될 안느에 대해 엘렉트라 콤플렉스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무리지어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1월이라 ‘더위와 달빛에 취해서 밤마다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겨울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 낸 모래무늬를 볼 수 있다. 아래로 얕게 패였거나 위로 봉긋하게 올라온 모양이다. 군데군데 생긴 요철무늬는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 아이의 감정기폭과도 같았다. 책 속에 어른거리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감정이 황갈색 모래무늬와 섞인다.
세실에게 안느란 인물은?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만 ‘거만하고 냉담한, 상냥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겁을 먹게 하는 침착함을 지닌 얼굴’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일종의 방어기제로 일방적 복수심의 대상이 될 복선을 까는 걸까. 저변에 깔린 세실의 의식 한가운데 안느에 대한 무의식적 공격성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황금빛 모래 위를 걸으면 걸을수록 발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진다. 해변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내내 안느에게 까칠한 세실의 모습이 떠오른다. 줄지어 있는 호텔과 카페들. 그 옛날 이곳 어느 한곳에 아마 사건의 중심이 되었던 ‘태양’이라는 술집이 있었을 게야. 그 술집에서 세실은 안느만 제거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새어머니와 경쟁할 수 있다는 심리가 발동했을까. 궁금함에 대한 갈증이 커피 한잔을 당긴다. 목을 적신다.
쟁취하고 싶고 경쟁심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끈끈하게 묻어나 보인다. 남자친구 씨릴이 ‘신뢰감을 주지만 씨릴과 같은 젊은이에게 끌리기보다 아버지나 40대 남자들을 더 좋아한다.’고 토로하기까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 적이라든가 혹은 안느에 대한 건전하지 못하는 생각에 대해 진정한 원인은 무더위와 베르그송, 그리고 씨릴의 부재 탓’으로 돌렸으나 근본적으론 아버지에 대한 애착, 애정의 유대관계가 더 컸으리라.
안느의 사고를 접했을 때 세실의 태연함을 보라. 눈에 가시였던, 혹 덩어리가 제거되기라도 하듯 내심 승리에 대한 쾌재를 불렀을 수도. 고인에 대한 진심어린 애도가 없다. 간단하게 아무 일도 아닌 양 치부해버리는, 일종의 단락행동短絡行動 short-circuiting 만을 보였으니 말이다. 아버지에게서 안느를 따돌리고 죽게 한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세실은 무의식적 충동을 감지한 듯 슬며시 낯선 타인 같은 슬픔, 권태로운 슬픔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권태와 감미로움이 내 머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슬픔이라는 아름답고 무게 있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나는 주저하고 있다.’는 소설의 첫 문장과 ‘여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 모든 여름의 추억도 안느! 안느의 이름을 어둠 속에서 자꾸만 불러본다. 그때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해서 맞아들인다. 눈을 감은 채…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마지막 문장.
두 문장에서 보듯 슬픔에 대한 세실의 언어는 낯설고 복잡하다. 남녀 간 사랑에서 빚어진 평범하고도 막연한 슬픔, 인간 저변에 깔려있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 뿜어 나오는 부조리하고도 묘한 슬픔이 어지럽게 섞인다. 대상을 향한 악의적 충동의 무통제, 감정과 행동에서 절제되지 않은 슬픔, 그런 슬픔의 빛깔에 물든 <슬픔이여 안녕>!
막연함과 묘함이 섞인 색깔을 바다에 풀어놓고 손을 흔든다. 제목의 ‘안녕’은 작별의 안녕이 아니지만 난 ‘안녕’으로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과거의 뒤안길에다 슬픔을 내려놓고 이제 현재의 공간을 즐기자.
해변 입구에 펼쳐진 벼룩시장이 보인다. 조금 전엔 없었는데 이국땅에서 중고물건 시장을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쓸 만하고 격조 있어 보이는 물건들이 새 것 같다. 보석, 시계, 가방, 구두, 주방용품, 엔틱 가구 등이 화려하다. 선뜻 욕심이 난다. 욕심은 욕망이 된다. 차라리 서둘러 도시의 나머지를 둘러보자.
오밀조밀 빼곡한 상가를 지난다.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도 빼 놓을 순 없지. 말로만 듣던, 계단 위로 펼쳐진 레드 카펫. 그 옆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직도 하얀 눈을 덮고 있다. 매스컴으로 봤을 땐 그렇게 화려해 보였는데 소박하다. 일반인들도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친숙하다. 유명 배우들의 핸드 프린팅도 눈을 즐겁게 하며 사강을 만난 기쁨 못지않다. 돌아 나오니 또다시 바다다.
저 멀리 소나무 숲은 소설 속 별장을 가리고 있다. 우리 감정에 내재된 진정한 ‘슬픔’도 가리고 있지 않은지. 하루해는 저물고 슬픔도 저물어 간다. 손사래를 치듯 밀려오는 파도는 모래무늬의 요철문양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너울대던 슬픈 감정은 등을 보이며 시야에서 멀어진다. 저녁별이 되려나. 다시 새벽별 되어 새로운 슬픔에 인사를 하겠지.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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