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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기대봐-2014년 <에세이 문학> 가을호 발표

율리안나 2015. 4. 20. 20:25

나에게 기대봐
장금식

길을 지나가며 유심히 바라본다. 철골 뼈대가 길게 이어져 있다.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깔끔하다. 녹슨 자국을 겨우내 상처처럼 달고 있었는데 새봄을 맞아 곱게 단장을 했다. 하얀 옥양목 옷을 입고 새싹이라도 기다리는 것일까. 누구든지 오면 다 받아줄 듯, 품이 넓어 보인다.
어느새 담벼락 여기저기에서 인동초가 덩굴을 뻗고 있다. 추운 겨울에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견딘다는 인동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길고 둥근 잎이 사각 철골을 지지대 삼아 몸을 기대고 하늘을 향해 여린 순을 올린다. 왼쪽으로 조금씩 감아 올라간다. 네모난 액자 속에 담긴 한 폭의 그림 같다.
인동초 줄기가 무척 가늘다. 어렵게 꼬면서 올라가는 몸짓을 보니 허공을 누비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면 어쩌나 싶다. 여리고 가냘픈 몸을 의지해주는 건 저 철골이다. 여린 순과 철골은 기대고 받쳐주는 관계 속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저들에게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어떤 덩굴은 지지대 절반부터 감고 올라오다가 옆길로 새어나와 넘어져 있다. 감고 오르는 방향도 갈피를 못 잡고 ‘갈지자(之)’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빙빙 돌다가 현기증에 아찔 중심을 잃었나보다. 마치 부모의 간섭이 싫어 아무 쪽으로나 가려다 길을 잘못 든 아이 같다. 상대가 누구든, 아무리 도움을 주려 해도 받지 않으면 마음이 서로 어긋난다. 저 여린 순과 지지대는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가보다.
또 어떤 덩굴은 감아가던 줄기가 아예 꺾여 땅에 떨어져 있다. 누렇게 변한 잎이 바싹 말라 금방 부서질 듯하다. 지지대에 걸쳐보지도 못 한 것 같다. 기댈 곳을 잃고 허공에 길을 내려 한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세상을 외면하고 자신을 무생명적 존재로 건조하게 말려버린 걸까.
보잘 것 없고 나약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잘 가는 덩굴도 있다. 지지대에 몸을 살짝 걸칠 듯 말 듯,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하늘을 향한다. 아무리 삶의 기반이 흔들려도 고난을 견디며 지혜롭게 제 길을 가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나는 잠시 인동초의 마음이 되어 본다. ‘나는 어디에서 왔나?’ ‘왜 여기 있을까?’ 삶의 근원과 존재 이유를 묻지 말고 접어보자. 척박하든 비옥하든, 내게 주어진 땅을 받아들이자. 어떤 선을 그어놓고 각을 세우지도, 이웃하고 있는 덩굴과 거리를 두지 말자. 작든 크든 도움의 손길이 되어준 지지대에 감사하며 액자 속의 풍경을 사랑으로 기억하자.
인동초의 삶이 쉽기만 했을까. 아무리 지지대가 있어도 제 몸을 틀어 감아 올라가려면 인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동초가 그런 시간을 넘으며 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흰색 꽃이었다가 노랗게 변하기까지 융융거리던 속 근심이 얼마나 컸을까. 어둠 속 험난했던 그간의 삶을 풀어 젖히기라도 하듯 꽃잎들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그 안 깊숙이 실오라기만한 꽃 수술이 대여섯 개. 손을 오므렸다 폈다, 구애라도 하는 걸까. 제 향기를 내주려는 자비의 손길 같기도 하다.

꽃을 틔운 인동초를 보니 지나간 세월과 맞닥뜨려진다. 집안이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언니가 가장역할을 하며 나와 동생들을 돌보았다. 나는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대학 등록금을 내 힘으로 마련하고 내 입 하나를 덜기 위해 먼 친척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당시 나에게 세상은 어둡기만 했다. 모든 것을 부정했다.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까지의 통과 관문이었던지 그때는 그랬다. 행 아니면 불행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온통 일기장이 흙과 백의 논리로 빼곡했다. 그런데 내가 없는 사이에 집주인이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았다. 자기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지 나를 한 달 만에 쫓아내고 말았다. 이런 나를 이해해주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준 사람은 언니였다.
갈 곳을 잃고 언니에게 돌아갔다. 아무 말 없이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다시 언니의 지지대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던 시기를 통과하고 무사히 대학을 마쳤다. 내 삶에 언니가 없었더라면 나도 길을 잘못 들어 중심을 잃거나 허공에다 헛발질을 한 덩굴이 되었을 것이다.
아팠던, 벼랑 끝에 달려있었던 나를 보듬고 품어주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아웃사이더 같았던 나를 한 켜 한 켜씩 단단히 감아 주었다. 허술하거나 헐거워질 수 있는 삶의 순간순간을 다잡아 주었다. 긴 겨울의 추위와 아픔을 견디고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해 주었다.

담벼락에 올망졸망 붙어있는 인동초를 바라본다. 나는 상상한다. 수많은 덩굴이 나를 비집고 들어온다. 넘어져 시들어가는 덩굴의 울타리가 된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덩굴을 받쳐준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누구든지 나의 몸을 감고 넘어 가렴’
‘나에게 기대봐’
이젠 내가, 나이 든 언니의 지지대가 되어 인생의 꽃을 피우게 하고 싶다. 언니에게 받은 걸 다른 이들에게도 돌려주고 싶다. 그들이 덩굴을 올릴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무성하게 피어있는 인동초 꽃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짙은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약력: 2014년 <계간수필> 봄 호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