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감상

<너머의 미학> 정경희

율리안나 2016. 4. 24. 13:17

‘너머’의 미학



정경희


거인이 눈앞에 되똑 서 있다. 그의 몸무게는 50톤, 키는 22미터. 역대 중 최고의 장신으로 팔이 움직인다. 그는 복제되었다. 독일, 스위스, 미국, 일본, 노르웨이 등에 이어 일곱 번째로 2002년 이곳에 세워졌다. 조나단 보롭스키(Jonathan Borofsky)가 그를 낳은 곳은 신문로 2가 흥국생명 빌딩 앞이다. 그의 이름은 ‘해머링맨’.

너머를 바라본다, 오후들.
그는 바닥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오른팔로 1분 17초 간격으로 쉼 없이 망치질을 한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 그와 호흡을 맞춰 보려 하지만 저 망치질은 나의 급한 성미를 미처 못 따라간다. 마음을 내려놓아라, 느긋하게 돌아보라, 며 천천히 종용한다. 길게 숨을 내뱉는다. 빠름과 느림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여유가 깃든다.
게으름이 나무늘보 걸음으로 망치질 사이를 비껴간다. 버스들이 뒤뚱뒤뚱 졸린 듯 기어간다. 소음이 끊긴 대로가 오수에 빠진다. 빌딩도 나무도 꾸벅꾸벅. ‘빨리빨리’에 젖어 있는 나는 한 템포 놓친 채 그와 함께 오후 세 시의 하품을 즐기고 있다.
너머는 슬그머니 일상을 내려놓는 배경이 된다. 그 배경에 쫓김도 고간도, 왈칵 밀려드는 고독도 쉬어 가고……. 나는 느리게 느리게 고개를 돌려보는 거다. 일상 너머 고독 너머 내가 발 디딘 ‘이곳’ 너머, 그 ‘너머’의 가슴으로 딱딱해진 가슴을 따듯이 데워 보는 거다.

너머에서 바라본다, 저녁들.
흥국생명 빌딩 맞은 역사박물관 앞 벤치. 온종일 교정 원고에 갇혀 있다 나오니 눈이 뻑뻑하고 사물의 초점이 흐리다.
저녁 일곱 시,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자동차 불빛과 소음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조명을 받은 키다리 해머링맨이 위풍당당하다. 그는 여전히 망치질을 한다. 되풀이되는 업무 속에서 기계가 되어가는 현대인, 점점 말이 없어지는 사무원, 그 속에 내가 있다. 그만 쉬라고 매듭 불거진 그의 손을 꼬옥 잡아 주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십일월이 저 망치질 속으로 사라진다. 십일월엔 깃들게 하라. 고독도 절망도 멜랑콜리도 가을의 마지막 온기로 품으라.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의 이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일.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신뢰의 뒷모습, 보이지 않는 것들은 진실의 눈일지도.
저 해머링맨이 불편하다. 저 망치질이 불편하다.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연간 27만 3천750회라니, 프랑크푸루트, 바젤, 시애틀, 나고야 등지에서도 일하라 단단해져라, 아주 천천히 종용하겠지. ‘일꾼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작가의 의도 너머 ‘평생 파트너로서 딴딴한 약속’ 따위 기업의 의지 너머.
저것은 쇳조각 너머 예술품. 나는 무례하게 그 망치를 빼앗아 쾅쾅쾅 깨부수고 싶다. 표리부동한 것들, 짓밟는 것들, 유들유들 낭창낭창 흐리는 것들, 설탕을 바른 것들……, 단백질 썩은 것들을.
해머링맨은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푸른 밤하늘로 날아오른다. 아주 천 ‧ 천 ‧ 히.



* 약력
전남 함평 출생.
2006년 《작가세계》 시 등단.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2005년《에세이문학》수필 등단.
에세이집 《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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