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를 건너다
민명자
횡단보도가 가까워졌다. 녹색 신호등의 역삼각형이 하나 둘 셋…. 반쯤 남았다. 뛸까? 뛰면 횡단의 물결에 합류할 수 있다. 뛸 수 있다는 건 생명의 약동이고, 자유이고, 축복이다. 뛰자. 빠르게, 아주 빠르게, 마음은 알레그로비바체로 뛴다. 아, 그런데 뛸 수가 없다. 발을 다쳐 석고붕대를 하고보니 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라르고의 음조로 걸으며 횡단의 대열을 바라본다.
녹색 삼각형이 한 개 남았다. 그런데 그때 할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허리는 반쯤 구부리고 지팡이를 짚었다. 왕복 8차선 도로다. 금방 빨간 불로 바뀐다. 벌써 오토바이 몇 대는 쏜살같이 달리고, 멀리 떨어진 정지선에서 슬슬 움직이려던 자동차 운전자들은 일제히 할머니의 행보에 시선을 꽂으며 기다린다. 숨죽이는 정적, 그 길 가운데를 할머니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혼자, 느릿느릿 걷는다. 반대쪽 네 개 차선에 있던 차들은 이미 기세 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휴우, 할머니가 겨우 양쪽 차선을 가르는 노란 선 안에 섰다. 이쪽에서 할머니를 주시하던 차량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자동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리는 경계선에 서 있는 할머니를 보기가 아슬아슬하다.
마음으로는 천릿길을 달릴 수 있어도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그러니 몸이 마음에, 마음이 몸에 보내는 경고신호를 잘 알아차리고 서로 조화롭게 보듬어주어야 매사가 순조롭다. 어느 한쪽이 승하면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때로 몸은 형이하학적 욕망의 화신으로 비천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몸이 있어 마음이 그 안에 둥지를 틀고, 드넓은 우주공간이 있어 그 안에 만물이 깃든다. 그릇 안에 물이 담기는 이치와 같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치성을 드리기 전에 목욕재계부터 했고, 접신(接神)을 하여 신탁을 받는 제관은 제의에 임하기 전에 몸부터 정히 했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합류하여 천지만물과 한 줄기로 어우러져 흘러가기 위함이리라. 합류는 ‘어울림’이며 ‘하나 되기’이며 ‘조응’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기나긴 인생길을 통과할 때도 합류의 묘(妙)가 필요하다. 마주오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거나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횡단의 무리와 함께 섞여 걸으려면 서로 신호를 잘 읽어야 한다. 금지와 허용 혹은 멈춤과 나아감을 알려주는 적신호와 청신호 등이다. 몸과 마음이 조응하듯 너와 내가 눈빛과 눈빛을 교환하면서 진정한 마음의 언어를 나누는 일, 그것이 타인과 동행하며 세상을 건널 수 있는 제1요건일 게다. 인생은 모노드라마가 아니라 너도나도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이며 배우이자 관객인 합동무대이며 한바탕 놀이마당이기 때문이다. 각자 배역은 다르지만 그 판에서 함께 숨 쉬며 노래하려면 ‘너, 나, 우리’가 호흡을 맞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선한 의지와 긍정의 가치를 따라 얼~쑤, 알맞은 마디에 지화자, 가락에 맞춰 추임새를 넣으며 여럿이 어우러질수록 푸지고 신명나는 한 판이 된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도 횡단보도가 있다. 그런데 그 길을 잘 건너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다. 내 멋대로 무단횡단을 하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고 고장 난 신호등 앞에서처럼 무한정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횡단에 서툰 나는 매일매일 합류연습을 한다.
저만치서 깜박깜박 적신호를 보내는 그녀. 자기가 시간 날 때 전화하겠다는 그녀의 응답은 겉으로는 매우 완곡했으나 그것은 자기가 원할 때만 소통을 하겠다는, 완강한 접근금지를 알리는 신호였다. ‘전화 한 통화’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행위가 의미하는 폭은 넓고도 깊다. 내가 어떤 신호를 보낸다 해도 무응답으로 되돌아올 공산이 컸기에 처음엔 그냥 기다렸다. 억지로 소통을 하려다 다시 거절당했을 때 받을 상처를 피하고 싶기도 했거니와, 한편으론 ‘세상만사 변치 않는 건 없으니,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겠노라’는 심정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에 몇 번씩 통화를 하며 온갖 고민을 털어놓던 그녀가 소식을 뚝 끊은 지 한해가 넘다보니 차츰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내가 보았다고 여겼던 적신호는 내 마음이 빚은 착시(錯視)였던 건 아닐까. 오히려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이 그녀에게 적신호로 비쳤던 건 아닐까. 외국의 어느 도시에선 횡단보도를 건널 사람이 스위치를 누르면 녹색신호로 바뀌지 않던가. 그래, 이쪽에서 녹색신호를 눌러보자. 마침 공적인 만남의 기회도 있으니 잘 됐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보자.’
그날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두물머리에서 두 개의 강물이 만나듯 서로 얼싸안았다. 그녀는 설핏,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이태가 지났다.
그런데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그녀는 그날 이후 다시 종무소식이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의 거리에 비해 내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마음평수가 그다지 넓지 못한 나로서는 의외일 만큼 내 마음은 평온하고 내 안의 녹색 신호도 아직 유효하다. 그날, 물기 어린 눈에 비쳤던 그녀의 눈빛 그리고 그 눈빛에서 읽혔던 진심에 대한 나의 믿음, 우리 둘이 주고받았던 진실의 기억 그것 하나면 족하다. 남은 시간도 물결 일렁이지 않고 잔잔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은 때로 영원을 지배한다. 그 순간의 충만한 조응이 앙금을 씻어내고 횡단의 간극을 좁히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제대로 건너려면 마음의 상처를 싸맨 붕대부터 풀어버리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발을 싸맸던 석고붕대를 한 달 만에 풀었다. 이제 뛰어도 되겠다. 저 횡단의 물결과 합류할 수 있겠다. 몸도 마음도, 뛰자. 알레그로 비바체로.
‘간혹 스스로 택한 고독의 방에서 혼자 즐기는 사색도 소중하지만, 여럿과의 물결 속에서 얻는 동행의 기쁨은 더욱 값지다. 들판의 키 작은 쑥부쟁이 꽃도 홀로 피어 있는 모습은 외롭고 쓸쓸하다. 무리지어 피어 바람에 흔들릴 때 아름다운 군무가 된다.’
이는 인생횡단로에서 합류의 대열보다는 홀로 외진 길에 서있는 날이 더 많은 내가, 엇박자를 덜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呪文)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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