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고흐, 리듬 앤 블루스> 정선

율리안나 2016. 8. 17. 20:27

고흐, 리듬 앤 블루스

정선


그랬겠지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은 죄악이잖나

출출하군
맨 먼저 자네를 찾아 모자를 벗고
노란 다알리아꽃을 바치는 게 마땅하나
빈속으로는 저 찬란한 밀밭 위 태양에게 질식당할 것만 같아
나 홀로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기려네
자네가 누워 있는 너머 유채밭에서 말이야
아침 일찍 퐁투아즈행 기차를 타고 생투앙 로몬을 지나
오베르 쉬르 와즈역 앞, 거기 모로코 카페가 있더군
난 카페오레 한 잔으로 자네 맞을 준비를 했다네
카페 아래 마을로 가다 보면
공원 앞마당에 자네가 흔들리며 서 있더군
해진 청동 옷에 캔버스와 화구를 크로스로 멘 채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었을,
광대뼈 불거진 고집도 이곳에선 태양에게 녹아 항복했을 터이고…
꽃 속에 환한 시청사
맞은편 자네의 한 평 다락방도 봄날엔 빛나는구먼
마을 뒤 오베르성당 앞에 잠시 멈추었지
그림이 성당인지 성당이 그림인지
오솔길 너머 불타고 있을 밀밭 생각에 몹시 흥분됐다네

며칠 전 아를에 들렀었지
자네도 떠나고
별빛 테라스도 문을 닫았더군
론강 둑에 앉아 로제와인을 마시고
저녁노을을 어르고 달래다 별밤을 뒤로했지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절대적인 휴식이 론강에 밤하늘에 넘쳐흘렀다네
내 식사는 바나나 한 개 크루아상 하나
그리고 와인 한 병
어때 근사하지 않나?
자, 먼저 한 잔 받으려는가

저기 황톳길을 고개 숙이며 걷다가
사거리에서 서성이는 밀짚모자 쓴 한 사내
등짝을 치면 버럭 화를 낼 것 같은 강파른 사내
화구를 덕지덕지 둘러메고 수레국화 남빛처럼 파리한 사내

이 황톳빛 사거리에서 길을 잃었으면 좋겠네
도리어, 잃어버렸던 길도
잃어버리려 애쓰는 길도 이곳에선 또렷이 살아나는구먼

여기 누워 햇살을 아껴 베어 먹고
모처럼 단잠에 든 자네를 보니
내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거야
눈물이 흐르네
오해하진 말게
이건 구 개월 뒤 자네 곁에 누운 테오에게 바치는 눈물이라네
한걸음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자네의 가난을 한 스푼이라도 덜어 줄 수 있었을까만
절망은 죄악이잖나
두 석관 위 송악이
끈끈하여 얽히고설킨, 내 위로를 대신하는구먼
속절없이 담벼락 아래 튤립 수선화는 왜 이리도 환한 것이냐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밀밭 위를 버둥거리는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는
밀밭에서 태어나서
밀밭에서 뒹굴다
밀밭에서 죽는지도…
내가 타히티를 목적으로 삼을 때
불행은 시작됐지
타히티는 열정이 도달하기도 전
앞서 타 버리는 곳
푸드덕
잿빛 새 한 마리 유채밭을 날고
자네가 토해 놓은 붉은 목적이 밀밭에 푸르게 출렁이는 듯하네
아직도 미처 도착하지 않은 편지를
자네가 사랑한 칠십 일을
다 읽어 내지 못하겠군
참, 닥터 가셰는 안녕하신지?

자네가 램프 아래 고단한 감자를 떠났듯
언제든 화구도 팽개치고
달랑 맨몸으로 오게나
와운마을에 둥둥 떠 있어도 좋고
만재도 몽돌과 뒹굴어도 좋고

목적 밖으로,

아마도 오늘은 라부여관에서 하룻밤 묵어 갈 걸세
자 받게나
남루 한잔 권커니 잣거니
자네의 정원에 다시는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사이프러스나무가 춤추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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