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감상

<석모도 바람길> 이용옥

율리안나 2016. 9. 22. 15:32

석모도 바람길

이용옥

길을 나섰다. 언제부턴가 길에 서면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느낌이 든다.
차창 밖으로는 두텁던 햇살이 길 위에선 한낱 매운바람에 부서지는 빛 조각에 불과했다. 추수를 마친 논의 물고랑에는 초겨울의 쪽빛 하늘이 내려앉았고, 바퀴자국 선명한 농로의 가장자리엔 마른 풀들만 무성했다.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눌러썼다. 트레킹화의 끈을 조이고 미니 배낭이 움직이지 않도록 벨트를 고정시켰다.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바람을 일으킨다는 석모도 바람길은, 제 능력을 과시하듯 쑥부쟁이의 여린 몸을 흔들어대다 내 등판까지 슬쩍 밀어본다. 바람의 땅, 바람의 길이다. 그 바람에 움츠러들어 한참을 걸었다.
그때 왜 하필 그녀가 떠올랐을까. 낚시터 옆 둑방길을 지날 때 며칠 전에 보았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여주인공 블랑시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무대를 보면서 그토록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그리고 지금 또 다시 그녀의 그림자를 안고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블랑시는 풍요롭던 가문의 몰락과 파산을 겪고, 첫사랑인 남편의 자살을 상처로 안고 있는 여자이다. 잊을 수 없는 과거와 궁핍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고등학생 제자와의 염문에 휩싸여 직장을 잃고 동생 집에 피신 온 신세였다. 그 상황에서도 자기의 분수를 깨닫지 못하는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더운 물에 목욕한 후 실크 가운을 찾는 철없는 여자이기도 하다. 시들어 초라해진 자신을 어두운 불빛으로 포장하여 다시 한 번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여자. 과거를 숨기고 마지막 연애를 시도하지만 자신이 경멸했던 제부(弟夫)의 폭로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는 그에게 능욕을 당하여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고 만다.
그 날, 멈출 수 없었던 눈물의 의미를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 탓이라고 여기며 나는 자연스럽게 안티고네를 떠올렸다.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연출을 맡아 선정한 작품이 ‘안티고네’였는데, 희랍 비극을 번역한 대본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코러스의 지루한 배경 설명과 해설은 진부했고, 문어체의 대사는 불편했다.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어둠 속의 빛 같은 안티고네의 신념 때문이었다. 권력자 크레온의 독재에 저항하는 안티고네의 용기와 열정은 작품의 모든 단점을 감싸고도 남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밤마다 안티고네를 죽였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No’라고 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크레온의 회유와 협박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신념이 권력자의 횡포를 단죄하는 불이되길 바랐고, 그녀의 절규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스물셋의 내가 정말로 안티고네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운명에 저항하는 진정한 초인(超人)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운명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허황된 꿈을 꾸는 블랑시에게 갇혀있다. 원래의 나라면, 눈물은 고사하고 천박한 여자의 가치 없는 이야기로 간단히 넘겨버렸을 일이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붙들어 놓는 것인가. 내 안에 숨어있던 나약하고 비굴한 본성이 느슨해진 울타리를 뚫고 슬쩍 고개를 쳐들어 보는 것인가. 내 삶의 주인이고자 했던 굳은 의지가 세월을 핑계로 순응과 타협에 자리를 내어준 것인가.
한참을 더 걷다보니 길 옆 논다랑이가 누렇다. 벌써 추수가 끝난 들판, 멀리 보이는 논배미들은 텅 빈 채 누워있건만 해변 가까이 서너 개의 논에는 아직도 베지 않은 벼가 가득하다. 짠물의 기습이라도 받았던 것일까. 자세히 보니 그 이삭들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다. 쭉정이! 알곡을 품지 못한 죄로 때가 되어도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서글픈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순간, 환영처럼 내 곁에서 서성이던 블랑시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쭉정이 벼이삭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카메라의 셔터 누르기를 기다리듯 담담한 그녀의 표정이 꼿꼿한 그것들과 하나가 된다. 알곡을 맺지 못한 것이 내 탓이냐고 무언으로 항변하는 빈 이삭들의 어깨위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삼랑염전에 이르렀을 때 갈대잎 서걱이는 소리는 더 거칠어졌고 발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소금기로 다져진 길은 그 옛날 염전이었을 때의 기억을 버리지 못한 듯 굳고도 반들거린다. 허옇게 염기(鹽氣)를 품은 둔덕 사이로 붉게 나부끼는 함초 무리와 판자가 날아가버린 채 푸른 넝마조각으로 대충 얽어놓은 소금창고는 황량했다. 벽체 저쪽으로 대하나 참게 양식이라도 했던 듯 버려진 고무통이 폐염전의 서글픈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때는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하여 창고엔 눈꽃 같은 소금이 그득했는데…. 값싼 수입 소금의 무차별적인 유입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놓아버린 일손 탓일까, 아니면 더 나은 미래를 바라고 눈을 돌린 양식업의 실패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은 걸까.
황폐한 소금밭을 가득 채운 바람소리가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고, 살아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듯 했다. 알곡을 맺지 못한 것이 내 탓이냐고 아우성치는 쭉정이 벼들의 외침이 다시 들리는 듯도 했다. 발가벗겨진 채 운명의 길 위에 서 본 적이 있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따져 묻는 불랑시의 애절한 눈빛이 보이는 듯도 하다.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는 것. 그것은 어쩌면 밤새도록 헛그물질에 빈 배 저어 돌아오는 어부의 밭은 기침소리 같은 것, 추락하는 운명의 공포 속에서도 허세의 끈을 놓지 못하는 블랑시의 간절한 눈빛 같은 것, 폐염전에 이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힘없는 잡풀들의 뒤척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에게 당신은 왜 안티고네가 되지 못했느냐고, 왜 그녀처럼 운명에 저항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까.
어둠이 궁싯거리며 마른 갈대의 발치를 더듬기 시작했다. 일행은 벌써 소금밭을 벗어나 선착장 가까이에 실루엣으로만 보이고 나는 아직도 갈대밭을 헤메고 있다. 길은 나를 가둔 채 길이 아닌 길 찾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어두운 길을 한참 더 걸으면 그 끝 전봇대의 외등에 불이 켜지고 종일토록 불어대던 바람도 잠잠해지려나. 저만치 매음리 선착장에 고깃배가 돌아왔는지 어슴푸레한 포구가 잠시 술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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