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21년 [선수필]여름호에 신작 에세이 <피난 안내도> 발표

율리안나 2021. 8. 29. 22:44

피난 안내도

장금식

 

긴 밤 어수선한 꿈은 조각조각 흩어진다. 무지근한 몸으로 새하얀 아침을 맞는다. 비몽사몽 아직도 꿈속인가 싶다. 아니다. 딸아이의 전화에 정신이 퍼뜩 든다. 지방에서 직장생활하는 딸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한다. 3 중 추돌 사고라 한다. 꿈 뗌을 하는가.

내가 걱정할까 봐 조금 다쳤다고 했으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정신은 아찔, 심장이 빨라졌다. 물 한잔을 마셨다. 들고 있던 물컵도 떨어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려야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예천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들었다. 에어백이 터져 얼굴에 큰 부상은 면했으나 급브레이크를 밟느라 턱이 운전대에 부딪혀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구강구조도 틀어져 입을 벌릴 수가 없고 씹을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다. 얼굴에 큰 부상이 없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세 대 추돌에 앞서 이미 그 앞에 두 대가 추돌해 있었다. 딸의 차가 제일 뒤에 있었지만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지 못한 게 화근이 되어 바로 앞차를 들이박아 버렸다. 급기야 그 앞차까지 부딪치어 뜻하지 않게 딸의 실책이 되었다.

세 대 추돌로 여섯 명이 병원 신세를 졌다. 운전 3년 차인 딸은 강한 경고를 받은 셈이다. 사고 당시 혼자서 어찌 감당했을까 싶었다. 겉으론 태연하지만 처음 당한 큰 사고에 내심 벌벌 떨었을 게 분명하다. 가해자가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을 게다. 조금만 속도를 더 줄였더라면, 집에서 1분 일찍 떠나거나 1분 늦게 떠났더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반대로 더 크게 다쳐 장애나 인명사고라도 생겼으면 어찌할 뻔했는가. 끔찍한 일이지만 이런 일들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프게 경험하는 딸이다.

포근하게 손을 잡고 안아주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같이 함께하면 사고 순간을 잠시나마 잊을 것 같아 병원을 지켰다. 좁은 병실 침대에서 딸아이를 껴안고 밤을 지새우고 싶었지만 딸 아이는 혼자 쉬고 싶다고 말을 에둘렀다. 제 딴엔 내가 편한 곳에서 자길 바란 것 같다. 할 수 없이 병원 옆 찜질방에서 낯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잠이 올 리가 없으나 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 여기며 ‘산소 방’이라는 표시가 적힌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눕자마자 왼쪽 벽면에 붙어있는 ‘피난 안내도’가 눈길을 끌었다. 화재나 돌발적으로 위험 상황이 생기면 대피하는 길, 그 안내대로 따라가 보았다. 나는 지금 편안하게 이 ‘피난 안내도’를 살필 수 있으나 딸에게는 심리적 ‘피난 안내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뜻하지 않게 본인을 포함해서 여섯 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 그들에게 고통을 줬다고 생각할 터이니 양심의 부담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를까? 사고에 대한 책임감은 물론이지만 부모가 된 나로서는 딸 아이가 빨리 정신적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용기가 될 말들을 딸의 ‘피난 안내도’에 새겨놓고 싶다. 지난 3년이 시간의 너울 속에 일렁거린다.

딸은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대신에 공군 학사 장교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긴 인생에서 자신의 영달보다 조금이라도 봉사할 기회를 가져 보겠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 길이 미약하나마 일종의 정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될 수가 있다고도. 험하고 힘든 길, 사서 고생할 필요 없다고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딸은 그 길을 선택했다. 장교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어리석은 가정인 줄 알면서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는 딸과 무언의 대화를 한다.

 

훈련 기간에는 비가 와도 훈련을 한다고 해서 유달리 눈시울 적신 날이 많았어. 빗속에서 훈련하는 너를 생각하면 마치 휑하니 집 나간 우산 같아 내 가슴에 내리는 폭우를 주체할 수 없었어. 네가 없는 방에서 깊은 그리움으로 너를 한없이 불렀어. 너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나에게 항상 버팀목이 돼 주었는데 빈방의 고독만 남기고 가버렸으니 축축한 마음은 습하기만 했어. 눅눅하거나 무거운 마음으로 축 처져 있기만 했는데 벌써 세월이 후딱 지나버렸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보다 네가 온통 비에 젖은 날이 많았을 군 생활이었을 텐데 맑은 날만 기대했던 내가 욕심이 과했다 싶다.

지금은, 네 가치관과 네 선택에 가슴 깊이 박수를 보낸다. 나라의 딸이 된 네 앞에서 부족한 내 이기심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지난했던 3년이 훌쩍 지나가는구나. 대한민국 공군을 지키기 위해 출근하던 길에서 네가 당한 교통사고. 그러니 너무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해.

피난 안내도는 도피가 아니라 잠시 안정을 취하고 다시 일어설 생의 지침이라고도 여겨지네. 인생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하게 큰일을 겪을 때가 있지. 한 번 실수는 두 번의 실수를 막아주는 각성제가 되기도 할 터이니, 다시 일어설 너만의 ‘피난 안내도’를 만들어 일로매진하면 좋겠어.

 

3년 복무를 마치고 곧 전역을 앞둔 딸은 취준생이라는 또 하나의 거친 삶과 마주해야 할 게다. 진정 ‘피난 안내도’가 필요한 때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와 봉사’라는 굳건한 삶의 철학이 있으니 어떤 돌발적 위기상황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