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늬를 그리다
장금식
배가 섬을 향해 막 출발하였다. 태국 동부 타이만, 코창 섬에 있는 코와이로 가는 중이다. 느릿느릿 몸체를 흔드는 큰 배 옆에서 작은 보트가 속도를 낸다. 작은 보트는 잽싸게 사라지면서 은빛 포말과 두 줄의 길을 남긴다. 그동안 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작은 배가 만들어내는 물길이 새삼스럽다. 코발트블루와 초록을 섞어놓은 것 같은 물빛, 파란 하늘엔 바다 빛을 닮은 새 한 마리가 곡선을 그리며 난다.
물결은 물의 숨결이다. 너울대며 춤을 추듯, 올록볼록 수를 놓듯, 실핏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물결들이 여러 무늬를 그려낸다. 얼핏 꽃무늬도 보인다. 로즈마리, 아이리스, 제비꽃들이 얼굴을 내밀다가 야자수 잎처럼 큰 힘에 가려 얼른 자취를 감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관광객들도 이 순간만은 한마음이 되는 듯하다. 이쪽저쪽, 배 가장자리에 모여선 동양인과 서양인들이 미추의 경계를 지우고, 마법에 빠진 듯 물길에 시선을 빼앗긴 채 침묵하거나 탄성을 지른다. 나는 선미船尾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작은 물고기가 물 위에서 담방 담방 물수제비를 뜬다. 내가 물고기를 구경하는 것인지, 저 물고기가 나를 구경하는지 알 수 없다. 순간, 두려움도 없이 물살에 살며시 발을 얹고 싶어진다.
변화무쌍한 물살에서 인간 삶의 궤적을 본다. 햇빛의 각도와 바람의 세기, 때에 따라 물의 기운과 무늬가 달라지듯 인생 또한 그러하다. 저 물결이 그리는 무늬처럼 때론 새끼줄처럼 꼬일 때도 있고, 듬성듬성한 그물처럼 구멍이 날 때도 있다. 인생은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감래苦盡甘來, 잠시도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내 생의 물결은 어떤 무늬를 그려왔는가. 무소유의 바다에서 흐르는 물결에 생을 맡기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욕망이라는 배에 탑승한 채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그것은 아무리 가도 물만 보이고 뭍은 까마득한 여정이기도 했다. 내 안에 작은 돛단배를 만들고 화려한 돛을 장식품으로 달았지만 먼바다를 항해하려는 계획에 구멍이 나기도 했다. 망망대해에서 창공을 발견할 때도 있었으나 열대지역 같은 삶을 통과하며 스콜을 만나듯 잠시 촉촉하다가 맑아지고 또다시 빗줄기를 맞이하는 삶, 그 삶이 순환하며 예까지 오지 않았던가.
한곳에 안주하며 세상을 낚긴 싫어 삶의 반경을 넓히려 했던 시간들, 그 과거에 매몰되어 있던 순간들도 잠시 왔다 사라지는 물살 무늬가 된다. 궤적이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 물결을 보니 시아버님의 삶도 밀려온다.
얼마 전, 12년을 함께 했던 시아버님이 먼 길 떠나시고 나니 삶이 한층 더 허망하게 느껴진다. 가족을 위해 일 년 중 거의 하루도 쉼 없이 동물병원에서 의사로 살아오신 그 삶이 연기 속에 타오른다. 화장터에서 본 뼈 몇 조각, 한 줌의 가루, 흰 종이에 접힌 채 항아리에 담겨 납골당에 자리 잡기까지. 명찰 하나만 달린 문이 철커덕 닫히고 자식들이 읊는 기도문이 끝나면 한 생이 끝나고 만다. ‘자식 먼저 보냈던 서러움마저 태우고 가시라’며 이별의 손을 흔들었다. 저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의 불안을 안고 물살의 요철이 심해질 때면 푸른 물빛에 합류하지 못한 듯 물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하나의 외딴섬이 되곤 했다. 나를 내 안으로 가두는 병에 지쳐 갈 때 시어머님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시아버님께는 내가 필요했다. 시아버님을 보살펴드리니 삶의 보람이 커지고 내 마음의 닫힌 섬이 열리며 소통이 시작되었다. 시아버님과 유달리 친구처럼 지냈던 시공간들. 함께 다녔던 카페와 레스토랑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 외식하시자고 하면 아기처럼 기뻐하시던 모습, 그렇게 좋아하시던 초밥과 카라멜마키아또도 물결무늬에 편승하다 사라졌다.
높이 날아오른 새가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며 폐곡선을 그리듯, 인생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 몸도 한 줌 가루가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높게, 넓게, 많게’라는 단어들이 시시각각 얼마나 많은 욕망을 키웠던가. 삶의 행간을 무시한 채 순수한 물결무늬에 상처를 입히면서. 허무한 생의 말로가 될지라도 그동안 높이를 위해 삶을 소비해 왔던 나날들이다. 욕망은 이기심을 부추기고 이기심은 균열과 단절을 오가며, 불안과 공포는 심리적 패닉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립의 섬을 만들면서 말이다.
바다 위 길에서 새로운 인생 항로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굳이 높을 필요가 없다는 것. 이 세상을 살면서 저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닌가. 너도 나도 다 그곳으로 가고 잠시 빠져 헤어나지 못했던 욕망의 늪도 피안에 묻히고 말 게다. 어차피 삶은 높은 곳을 향하는 여행이 아니라 땅속 낮은 곳을 향하는 여행이리라. 작은 물고기가 낮게 길을 내고, 타이만을 날고 있는 저 새는 낮은 곳으로 나를 인도하고, 인간이 처음 떠나온 대지에서 다시 인간의 본향으로 돌아가듯 시작과 끝은 원점에서 만난다.
이윽고 코와이 섬에 도착했다. 섬의 풍광을 즐길 시간이다. 내 인생의 배도 내 안의 섬에 정박했다. 섬 주위의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은 여전히 수없는 무늬를 만들어낸다. 내가 채워 나아가야 할 섬, 내 안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먼 길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그 인생 뱃길에선 어떤 무늬들이 그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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