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투르 리듬과 자유의 춤>
장금식
체에 걸러낸 듯 고운 모래가 바닷물에 섞인다. 격랑에 쓸려 재빨리 흔적을 지운다. 모래와 물의 교감이 잠시뿐임을 알아챈 듯 갈매기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촉촉한 물기를 핥으며 바다와 한 몸이 된다. 안개구름은 춤을 추듯 곡예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책장을 덮는 순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풍경들이 실제 그 바다 앞에 서 있는 듯 여러 이미지로 살아난다.
소설을 이끄는 주요인물 ‘나’와 ‘조르바’는 크레타섬으로 떠나는 항구에서 운명처럼 만난다. 책벌레라는 별명으로 문자 세계에 묶여있고 언제나 책 읽는 사람으로 비친 ‘나’, 야생마 같고 도발적 행동으로 죽은 지식보다는 몸의 실천을 중히 여기며 행동하는 사람 ‘조르바’. ‘나’와 ‘조르바’ 앞에서 말 없는 바다는 산투르 리듬으로 흥겹게 춤을 춘다. 책을 읽는 내내 ‘자유’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크레타섬을 끌어안은 에게해, 조르바의 벌거벗은 바다를 나는 푸르게 상상한다. 진정 자유로운 삶이란 게 가능하기는 할까. 소설의 인물들이 화두를 던진다.
나도 책을 떠나 살 수 없고 형이상학의 테두리에 갇혀 늘 공허함과 갈증을 느낀다. 호탕한 성격과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조르바’를 마주하면 크레타섬에 있으면서 여기가 크레타섬인가, 할 정도로 넋이 나가게 될 것 같다. 삶의 조력자요 멘토로 삼고 싶은 매력을 지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대립으로부터 ‘보이는 것과 육체, 물질’이 ‘보이지 않는 것과 영혼, 정신’과 하나 되어 진흙처럼 끈끈하게 섞일 순 없을까.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인 탄광촌. 낯선 곳에서 낯설지 않은 조르바의 거침없는 행동, 과부에게 사랑을 쏟을 때나 탄광에서 일할 때나 매 순간 진정성이 담겨있으나 이건 뭐지, 하는 의문에 다소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렇다고 개념 없이 함부로 산다는, 1차원으로 그의 행동을 치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화자인 ‘나’와 달라도 너무 달라 다소 저항적 마찰을 예상하나 떨어지지 않으려는 두 관계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르바’의 인간 정신에 스며들어 나 또한 그의 자유가 탐이나 슬쩍 곁눈질해본다.
광부들과 섬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르바’의 행동을 보라. 인위적인 틀을 허물고 웃음과 해학, 내면의 소리에 따르라고 한다. 화자의 광산업 실패에 대해선 당황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객이 주인을 위로해준다.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지 않고, 내일 일어날 일도 묻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라는 말에 나도 무릎을 친다. 실패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좌절 대신 자축을 벌이는가. 양고기를 구우며 포도주를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이 초인 같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니체의 관점으로 본다면 조르바는 위버멘쉬(Ubermensch;초인)를 실현한 인물에 가깝다. 초월적 인간형,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이다. 니체의 인간 정신의 단계, ‘낙타, 사자, 어린이’ 중 어린이 단계로 사는 유형이다.
등에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리고 있는 낙타의 삶에는 묵묵히 일만 할 뿐 자유로움이 없다. ‘목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어. 모래 위의 잠이 꼭 나쁘지 않아. 사막에도 곧 바람이 불 거야. 나무도 자랄 테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낙타를 따라가며 사막 한가운데 동그마니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모래폭풍과 싸우며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낙타. 이 단계에 나를 끼워 넣는다.
사막이라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아등바등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안정된 삶을 지키자. 변화무쌍함 없는 고요에 잔물결도 일지 않기를. 겹쳐서 오는 재난은 이제 겪을 만큼 겪었어.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삶이다. 궁벽한 곳에서의 삶만 즐기는 사람이 어찌 넓은 세상을 유영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내가 ‘자유’를 찾다니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면서 내 영역이 아니라고 밀쳐놓은 사자와 어린이 단계에 자꾸 눈길이 간다. 무서운 사자가 밀림에서 숲을 호령할 때는 평화로운 자유를 생각지는 못하지만 ‘넌 낙타처럼 짐을 져야 하는 의무감은 없잖아. 야생의 들판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만 불완전하더라도 그나마 자유를 누리는 반쪽 행운을 가졌지. 부러워.’
어린이 단계야말로 나와 먼 거리에 있지. 내 것이 아니야. 고개를 흔든다.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목적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 순진무구의 세계는 그저 딴 세상일 뿐이지. 포도가 포도즙이나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가식과 위선이 없고 타자의 시선과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기 안에서 우상을 만들지 않고 내적 승화를 이뤄내는 것. 학벌이나 지식, 직업, 재산 등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바라보고 응해주는 경지’의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사막도 숲도 아니 곳에서 막연한 자유, 수동적 강요 같은 자유라도 만끽해보라는,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있는 단계를 접하니 책갈피를 넘길수록 초인적 ‘자유’가 온통 뒤섞인다.
내 안에서 자유란? 복잡한 마음의 굴레를 벗는 것이다. 얼기설기 얽힌 부정적 감정들과의 화해하기다. 불안, 슬픔, 욕망, 걱정, 실망감, 좌절, 무기력 등 출처 규명이 어려운 감정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작업. 구속적 상황에서나 자유로운 상황에서든 언제나 ‘자유’라는 단어를 노예로 만들지 않기다. 한동안 미숙한 자유라도 흉내를 내봐야겠다.
낙타가 사자 되기도 힘들지만 사자가 어린이 되기는 더욱 어려울 게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인간형을 생각해본 것만으로도 부정의 굴레에서 해방이 된 듯하다. 흐린 날, 희뿌연 황사에 가려진 시야와 매캐한 연기에 폐부를 움켜쥔 것 같은 답답함이 사라진 것 같다.
언젠가 크레타섬에 가게 되면, 소설 속 화자가 그려놓은 풍경을 따라가며 그가 그려놓은 이미지에 덧칠이라도 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거침없이 자신을 표현할 용기를 가지며 푸른 바다 위에 구속된 내 감정을 풀어놓자. 어설픈 붓놀림으로 잘못되거나 휘적거리다 말더라도 푸른 도화지가 되어준 바다에 걸림돌 없이 자유롭게 그려보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묘비명에 적은 것처럼 어떤 바람도 없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냥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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