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5년 [선수필] 겨울호에 신작 에세이 <지랄 총량의 법칙> 발표

율리안나 2015. 12. 3. 21:31

지랄 총량의 법칙

장금식

우스갯소리로 들리다가도 어떨 때는 욕이 되는 말이 있다. 지랄! 웃다가 내가 넘어지고 남을 넘어뜨리게 할 수 있는 재미, 단어에 묘미가 있다. 그런데 욕으로 들으면 붉은 햇살이 거품 물듯 분노를 일게 한다.

“야, 미팅 했는데 킹카들만 나왔더라. 어쩌면 잘 될 거야.”

“가시나. 지랄하네, 주제를 알아야지.”

듣는 사람은 뒷골이 뻐근해지지만 “뭐, 지랄? 지랄이라 했나?”며 능청스럽게 받아쳐야 쌍방 간의 어색함이 지워지고 기분 나쁘지 않다.

“오늘 학교서 당번도 아닌데 쉬는 시간에 칠판 닦아놓고 출석부까지 다 갖다 놨다.”

“아이고, 지랄도…”

‘그래, 잘 했어’라며 대 놓고 띄우기가 조금 어색할 때 에둘러 하는 말이라 “아싸, 내일 또 지랄하고 와야지”하며 이미 칭찬인 것을 알아차린다.

“야 이 새끼야, 왜 내 자리에 물건 놓고 지랄이야. -뭐, 지 자리? 지랄하고 자빠졌네.” 길거리 좌판을 놓고 싸우는 아저씨들의 말이다. 이럴 때 지랄은 진짜다. 옆에 있다간 날벼락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내가 왈, ‘우리 애 때문에 죽겠다. 사춘긴지 뭔지 이것도 트집 저것도 트집, 밥 먹고 간다고 했다가 우유 먹는댔다, 머리를 염색했다가 지웠다 또 염색하고, 바지도 줄였다가 늘렸다가 별짓을 다한다.’

“지랄도 가지가지 하네. 놔둬라. 실컷 해야 그 지랄 안 한다.”

실컷 해야 안하고, 또 평생 동안 누구나 다 해야 할 만큼 그 양을 지니고 있다는 지론이 K대학 K교수의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얼마 전 지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첫 아이는 대부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대학생이고 둘째가 조금 힘들게 하는 고등학생이 있는 또래부부모임이었다. 공교롭게도 막내들이 다 첫째보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지 그동안 아이와 함께 겪었던 이야기가 봇물 터져 나왔다. 자랑이 아니라 험담을 하니 공감대는 최고. 그러면서 “지랄 총량의 법칙”과 주변 사람들한테 들었던 지랄 얘기를 들려주는데 나 원 참! 우리 아이 정도로는 깜냥이 안 된다는구먼.

중고등학교 시절, 엄친아였지만 대학을 간 후, 더 이상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줄 수 없다며 막무가내가 된 아이. 명문대학 졸업에 일류직장 취업까지 하고 결혼상대로 데리고 온 파트너에 부모의 안구는 습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몇 마디를 하면 주객의 위치가 바뀌고 파렴치에다 배은망덕한 실제 같지 않은 실제 상황 이야기.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그뿐이랴!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사업한답시고 시작했다가 1년도 채 못 되어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가정에 들어앉는 남자 안주인도 적지 않다. 졸지에 경제적 치명타를 입은 가족은 무슨 죄람.

그런데 이 지랄병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 소멸 되느냐고? 특정 발작 기간도 만료날짜도 없지만 어느 순간에 펀치가 들어올지 모를 일.

평생 충실한 가장으로 오로지 가족 밖에 모르던 사람이 70이 넘어서 새로 할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할아버지도 있다. 한 풀이라도 하듯 돌출 행동을 일삼으며 남의 시선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할아버지. 맙소사!

듣고 보니 아이가 사춘기 때 객기를 부렸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어디 부모한테…’라며 속으로 욕하고 갈등을 하면서도 태연자약 미동 없이 받아들이기를 잘한 것인가. 철지나 하는 것 보다 제 철 지랄이 덜 아픈 것은 당연지사. 때늦은 지랄을 어찌 감당하랴.

우리 아이만, 우리 남편만, 우리 부모만 해당되는 줄 알았던 것이 모두의 통과의례라니 상당히 위안이 된다. 인류에 해당되는 말, 지랄, 심해지면 지랄병. 감정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예방할 수도, 치유의 꿀 팁도, 총량 초과도 미달도 없다. 때에 맞춰 하든지 철이 지나 하든지 오로지 총량을 채운다는 것이 포인트다. 내뿜는 악성 가스를 줄일 방법만을 생각하며 순간순간 위트를 담아 받아넘기는 고도의 맞서기 능력이 유일한 대처방법이 아닐까. 그저 유비무환, 안거위사安居危思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지랄이 꼭 나쁘기만 할까. 주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거나 피해를 주기는 하지만 한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있는 법. 모두 겉으로는 완벽하고 흠 잡을 데 없어 보여도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순물을 표출해내고 색다른 길로 들어서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할까. 미래에 불어 닥칠 미풍과 태풍을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하여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가져보고, 뭔가 새로운 시도도 해보며 다른 길로도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선로에서 이탈한다고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릴까. 자신을 탄탄히 정립할 수 있는 기회로 보면 순기능으로도 많이 작용하리라. 자기본능을 들쑤셔 일깨워 보는 것이야말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니까.

지금껏 한 길만 걷고 시키는 일만 꼬박꼬박 잘 해온 나는 범인류적인 이 질병을 언제 앓고 갈 것인지. 피해당한 자가 아닌 피해 준 자가 될 날도 올 텐데 걱정이다. 늦바람이 무서운 건 모두가 아는 사실, 나는 언제 지랄을 해 총량을 채울까. 그대들의 지랄 총량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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