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6년 [수필미학]겨울호에 신작에세이 <그리고, 10년 후> 발표

율리안나 2016. 12. 12. 21:49

그리고 10년 후
장금식

2026년의 하루를 상상해 봅니다. 집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일을 해 줄 로봇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편과 다섯 로봇들과 같이 삽니다. 머리역할을 해주는 로봇의 이름은 ‘로봇+브레인’을 뜻하는 ‘로레인’입니다. 나머지 넷은 로봇의 앞 글자 ‘로’에다 ‘희로애락’을 붙여 각각 ‘로희, 로로, 로애, 로락’입니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립니다. 내가 일어나면 로레인은 알람 정지 버턴을 누릅니다. 로희와 로로는 나의 얼굴을, 로애와 로락은 남편의 얼굴을 씻겨줍니다. 그리고 로레인은 성경과 돋보기를 갖다 줍니다. 성경 읽기가 끝나면 혈압과 기초 건강상태를 체크하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줍니다. 현미 콘프레이크와 신선한 과일, 요플레로 아침을 간단하게 준비해 줍니다.
오전 8시, 나는 신문을 읽고 로희, 로로, 로애, 로락은 집안일을 시작합니다. 둘은 청소기를 돌리고 둘은 세탁기를 돌립니다. 뚜뚜뚜뚜 신호가 울립니다. 로레인은 남편과 나에게 운동할 시간이라며 발목 펌프 운동 기구를 갖다 줍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줍니다. ‘주인님, 환영합니다.’ 기계가 반색을 하며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각각 600번을 다하면 이번에는 홈쇼핑 TV채널을 켜줍니다. 내가 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여행채널을 켜주고 곧바로 영화 한편을 틀어줍니다.
정오입니다. 희로애락은 현미밥과 신선한 야채샐러드, 생선구이와 카레, 소고기 백국을 끓이며 점심 준비에 바쁩니다. 밥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우리를 바깥으로 내몹니다. 아직 다리가 떨리지 않으니 등산을 가라합니다. 남편은 산으로 가고 나는 수필을 쓰겠다며 노트북을 폅니다. 로레인은 내 옆에서 이런저런 팁을 말해줍니다. 손끝으로 세상 이야기를 쓰지 말고 가슴으로 써 보라고 합니다. 획일화된 패턴을 벗어나 산골에서 파스타를 주문하듯이 생각을 뒤집어 보라는 말도 합니다. ‘그리고 10년 후’라는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그리고 10년 후>
2036년의 하루, 곧 휴가철입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이 유효할까요? 글쎄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로봇이 인간의 일을 빼앗아 간 나머지 할 일이 없는 직장인들은 말합니다. 휴가가 지겹다. 일 좀 해 봤으면 좋겠다. 언제 일터로 돌아가지? 학생들은 AI와 홈스쿨링을 하니 학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늘 방학이나 다름없죠.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어쩌다 한 번 갑니다. 직장 출근과 등교를 해보기 위해 앞 다투어 제비뽑기를 합니다. 경쟁은 2016년의 공무원 시험보다 더 치열합니다. 당첨된 사람들은 복권을 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립니다. 그뿐일까요?
AI 덕분인지, AI 때문인지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지시만 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살만 찝니다. 뚱뚱한 사람들의 세상이 되겠죠. 비만이 대세라 뚱뚱해지기 위해 성형까지 합니다. 전신 보톡스 주입이 인기입니다. 뚱뚱한 지인 한 분이 늘 보통 사이즈인 나를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녀를 부러워하게 됐습니다. 유행 따라 미녀의 기준도, 남자들의 시선도 바뀌어 10대부터 90노인까지 어떤 여자가 좋으냐는 질문에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아니라 예쁘고 뚱뚱한 여자”라고 답합니다. 성형외과가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로봇 버튼과 컴퓨터 자판, 스마트폰 누르기에 충성을 다한 나머지 엄지를 비롯한 손가락 끝 마비환자 때문에 외과나 물리치료실도 인기대박이에요. 로봇과 스마트폰 중독 증상 재활원도 만만치 않아요.
상전벽해는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 것이지만 인간의 세상이 AI세상으로 바뀐 결과에도 어쩔 수 없이 예스 예스를 합니다. 로봇은 날마다 진화 중에 있고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치명적 존재, ‘로봇파탈’이라는 말도 공공연하지만 부정 속에서도 긍정을 끌어낼 수도 있어요. 한편으론 공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돈 있는 사람들만이 휴가를 가던 세상, 예쁘고 날씬한 사람만이 대접 받던 세상이 뒤바뀌지 않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자꾸 꼬리를 뭅니다. 강남과 강북의 위상도 바뀌어갑니다. 일거리가 없는 세상에 높은 빌딩과 사무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굳이 강남으로 몰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비싼 곳에 머리를 눕힐 이유가 없으니 모두 강북으로 대이동을 합니다. 강북 땅값이 꿈틀대다 못해 흔들리며 치솟습니다. 강북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상상이 자꾸 신바람을 몰고 옵니다.

상상의 바다가 점점 깊어집니다. 부풀린 언어가 깊은 바다를 유영합니다. 깊고 넓은 바다에서 보석을 찾으려다 빠질까봐 겁이 납니다. 몸을 사려야 할까봅니다. 일단 초안으로 이정도 써 놓고 차츰 퇴고를 할까 합니다.
남편이 문 여는 소리가 들립니다. 상상의 세계에 빠져있는 동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희로애락을 부릅니다. ‘얘들아, 배고프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음식이 나옵니다. 현미밥에 콩을 넣었네요. 순두부찌개에 장조림, 김치와 계란찜, 오리고기와 상추쌈까지.
군침이 돌아 허겁지겁 먹으려다 잔소리를 듣습니다. 천천히 백 번씩 씹어 먹으랍니다. 내가 로봇에게 휘둘린다 싶어 한 마디 했지요. ‘까딱 잘못하면 백 살까지 사는데 빨리 먹어서 일찍 죽으면 행운이지. 좀비 같은 모습으로 오래 살아 뭐하냐.’고 했더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일장 연설을 합니다. 훈계와 잔소리를 듣다보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침대에 드러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봇도우미 덕분에 삶이 편해졌으나 주객이 바뀌는 상황이 자주 일어납니다. 로봇과도 갈등이 생깁니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로봇은 지옥’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옵니다.
잡스의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모두들 ‘그게 가능하겠어?’ 하며 의문을 품었던 게 사실이 되었어요.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있을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 후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었지요. 말하고 일하는 로봇이 내 일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추측도 실체가 되어 내 앞에 성큼 나타날 거예요. 내 ‘상상실험’이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전부 다 허황되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요. 스마트폰처럼 편리해도 단점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꼭 좋지만은 않습니다. 치러야할 대가도 있을 테니까요. ‘로봇과 춤을’ 꿈꾸었다가 로봇에게 밀리고 밟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