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6년 [선수필]겨울호에 신작에세이 <자유의 여신 마리안>발표

율리안나 2016. 11. 30. 20:27

<프랑스 문화 여행>
자유의 여신, 마리안(Marianne)
장금식

역사는 흐른다. 그 유유한 물결에는 인물들이 부유한다. 그들은 고요 속에 침잠해 있는 듯하지만 나라의 뿌리가 흔들릴 때는 영혼의 상징으로 버팀목이 된다. 쓰러지는 풀잎 하나라도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깃발 아래 프랑스혁명 정신과 공화국의 상징이 된 여신, 마리안! 그녀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프랑스혁명 후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자유의 여신이다.
4년에 한 번씩 미스코리아를 뽑듯이 새 마리안을 뽑을 정도이니 프랑스인들에게는 매우 큰 정신적 지주가 아닐까. 관공서나 법원 등은 물론 유로화 동전과 우표에서도, 프랑스 여행지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를 알려면 마리안을 알아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짧은 여행 기간 동안이지만 몇몇 마리안을 만나 보았다.
첫 번째 마리안이다. 파리테러가 있은 지 62일째, 파리 3구, 레쀠블리끄(Republique공화국) 광장을 지키고 있는 여신이다. 총체적 위기를 겪는 파리로선 그 어느 때보다도 위안을 받아야 할 때라고 말하는 것 같다. IS(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의 잔혹한 테러로 파리가 위축되어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얼음이 섞인 듯한 겨울바람에도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촛불을 밝히고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타오르는 촛불을 내려다보는 여신상 아래서 나도 촛불 하나 밝히고 위를 올려 보았다.
회교와 기독교 문명 간의 갈등이 소리 없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노골적으로 형체를 드러내는가. 내부 깊이 보이지 않는 상처의 치유보다 두꺼운 겉옷으로 드러난 상처만 봉한 것에 드디어 한계가 온 것인가. IS대원에 자국민이 많다니 어찌된 일인가. 대혁명 이후, 똘레랑스(tolerance:관용) 정신을 이민자들에게도 실천했을 텐데 회교도 인들에게 돌려받은 것은 참혹한 테러참상이 아닌가. 그동안 묵묵히 지켜온 그 가치관이 흔들리기라도 하듯 여신상의 눈동자에 결단어린 단호함이 묻어있는 것 같다.
광장 가장자리에 들어선 몇몇 카페들도 여신상을 보고 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파리지엔들의 한가로운 모습. 그 뒤안길과 골목길에 쫓기는 자들의 절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틈새에서 침묵이 입을 벌린 것일까. 시시비비를 떠나 무고한 시민의 희생이라는 가시 돋은 아픔에 여신상도 곧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여신상은 오른손에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칼을 차고 있다. 평화를 갈구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으로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가한 자와 당한 자들 사이에서 당장 서로 얼싸안고 등을 내어주며 토닥거려주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질적인 종교를 멸시하기 보다는 인정하고, 증오하기 보다는 화해하며, 무고한 희생이 더 이상 없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본다.
두 번째 마리안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민중을 위한 자유의 여신상>이다. 낭만주의 화가, 외젠느 들라크루와(Eugene Delacroix)의 그림이다. 그녀는 오른손에 프랑스의 삼색기를, 왼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혁명의 선봉자, 민중의 별처럼 이미지가 강하다. 뜨거운 사막이나 설산의 경계를 거부한, 늘 푸른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났던 7월 혁명을 주제로 그렸으니 생명의 이미지로 되살아나 액자를 뚫고 나올듯한 기세는 당연하지 않을까.
오디오 가이드로 그림설명을 듣는다. 1814년의 왕정복고로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샤를르 10세가 대혁명 이후 민중의 피로 일구어 놓은 자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과거의 정치체제로 회귀하려하자, 시민들이 크게 격분하여 일어난 혁명. 1830년 7월 27일, 소시민, 기능공, 노동자, 학생 등이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왕의 군대와 시가전을 벌여 3일 만에 왕궁을 진압하였던 7월 혁명 이야기다.
들라크루와가 혁명 당시의 거리 모습을 자세히 그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가 떠올랐다. 나는 이 그림에 ‘다시, 민주주의’ ‘다시, 타는 목마름으로’ 라는 부제를 붙여보았다. 우리의 80년대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젊은 피가 그림 뒷면 액자 위로 노을처럼 붉게 타는듯했다.
나는 속으로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마리안, 당신이 들고 있는 삼색기가 대혁명 이후 또다시 거리로 나왔군요. 삼색기 휘날리며 군중에게 정의를 지키려면 나를 따르라고 독려하듯 결의에 찬 모습을 한 당신은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를 외치는 정의의 투사답습니다.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입은 남성과 셔츠를 풀어헤치고 캡을 쓴 젊은 노동자, 하층 계급의 소년등도 진두지휘하는 당신을 지지하며 따르고 있군요.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쓰러진 시민들의 시체는 보기만 해도 끔찍하군요.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쓰면서, 또 외치면서 그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죠.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으로 오늘날 자유를 갈망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법 앞에 만인의 평등과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싶어요.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로, 맨발로, 전쟁터가 된 거리를 장악한 당신은 어린 소년마저 혁명에 나서게 만든 하나의 이상, ‘자유’의 힘을 지닌 분이라는 것이 가슴 서늘하게 와 닿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것은 전 세계의 사회적, 보편적 열망이 아닐까 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린 무고한 시민들의 고귀한 정신을 남기고자 하는 작가의 정신도 오래 기억해야겠군요.’
민중의 고귀한 희생이 훗날, 민주주의의 텃밭으로 오래 남게 하려는 작가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며 루브르의 남은 여정을 마쳤다. 다른 그림을 봐도 머릿속에는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만 자꾸 되새겨진다.
세 번째 마리안이다. 파리의 정취와 낭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센 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상에서다. 파리여행 첫날에 한 번, 막바지에 이르러 또 한 번 더, 두 번이나 유람선을 탔다. 센 강변 양쪽에 서 있는 건물들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와 닿아 눈이 호강한다. 유명한 관광지를 배 위에서 보는 느낌은 실제 그곳에 가는 것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에펠탑 바로 옆에 선착장이 있다. 지하철 ‘비르 아켐(Bir-Hakeim)’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된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그렇게 크지 않고 또 유람선을 타자마자 곧바로 있기 때문에 쉽게 놓칠 수 있다. 아름다운 다리, 그르넬교(Pont de Grenelle) 한쪽 편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여신상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머리에 쓴 일 곱 개의 뾰족하고 긴 왕관은 7개의 대양과 대륙을 상징한다. 왼손에 들고 있는 책에는 독립기념일인 1776년 7월 4일이 적혀있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 자유를 상징한다.
센 강변에 자리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혁명 백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이 감사의 표시로 프랑스에 보낸 조각상이다. 규모는 작으나 의미는 같으리라. 센 강 유람선에서 빠트리지 말아야할 마리안 여신상을 보며 오늘날 우리가 배를 타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자유의 여신 마리안 덕분이 아닐까싶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프랑스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마리안 정신이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변함없이 살아있는 것이 놀랍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흩어질 수 있는 민심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잔인한 테러 앞에서도 꿋꿋이 아픔을 이겨내게 해주며 모두가 하나 되어 레쀠블리끄 광장으로 모이게 하지 않던가. 숙소에서 레쀠블리끄 광장까지의 길은 짧으나 긴 여정으로 내 마음의 길 하나를 열었다. 파리 빈터 한 곳에 나의 여신상 하나를 세워본다. 프랑스의 마리안 정신에 ‘화해’의 의미를 담은 여신상 같은.

마리안 여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침묵은 또 다른 언어의 의미 확장이 아닐까. 발화가 필요할 때,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위안을 제공한다. 땅 속 줄기는 길고 넓게 뻗어 프랑스의 영혼을 꼭 붙들고 있다.



*참조: 이명옥 <미술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들>
*인용: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