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6년 [계간수필] 겨울호에 신작에세이 <아름다운 도시, 페낭> 발표

율리안나 2016. 11. 28. 00:23

아름다운 도시, 페낭
장금식

우중충한 비구름을 걷어내고 무지개가 활을 그린다. 한겨울, 서울의 추위를 뒤로하고 열대를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늘에 떠서 내려다보니 일출인지 일몰인지 가늠할 수 없는 햇빛이 아련하고 몽롱하다. 서울과 말레이 반도의 냉기와 열기, 현재와 미래의 여행지 사이에서 꿈을 꾸고 있다. 객실 사이를 휘도는 듯한 바람 한 줌에 눈을 뜬다.
드디어 도착했다. 새로운 곳이다. 단단히 싸고 있는 도시의 외피, 그 내피를 하나하나 벗기고 싶다.

#1. 역사는 숨 쉰다.

말레이시아 페낭의 고풍스러운 도시, 예스러움에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역사와 함께 쓸쓸함도 묻어있다.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던 도시다. 영국 의 지배를 받는 동안, 영국 동인도회사가 이곳에 들어오면서 조지3세 왕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리, 조지타운은 아이러닉하게도 오늘날의 최고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에서 과거를 본다. 조지타운을 도는 무료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본다. 식민지 시대의 관사나 유럽식 성당과 교회, 학교들이 차창 밖 풍경으로 스친다. 버려진 폐가와 아무데나 널브러진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제멋대로 그려진 벽화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오래 전에 그려진 것도 있고 물감과 잉크가 막 마른 그림도 있다. 대단한 그림은 아니지만 동물이나 집, 추상성이 돋보이는 예술적 감각을 곁들인 그림이라 허투루 볼 게 아니다. 동물들의 눈빛이 갸우뚱, 눈자위 덧칠해놓은 삐딱거리는 음영은 억눌림의 표출인가. 아픈 상처를 봉하려는 해학과 역설이 담긴 듯하다. 색을 먹은 도시의 벽을 지나가며 무료 버스로 몇 바퀴 돌고 내렸다.
그 옛날 페낭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상상이 떼구름을 몰고 온다. 해변을 무작정 걷는다. 화려하지도 부산하지도 않은 도시. 무심한 듯 스치는 바닷바람이 오히려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초창기 이 곳 사람들의 각인된 아픔이라도 되듯 바람이 싸하다. 작은 항구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비릿한 냄새에 몸이 젖는다. 수백 년 간 서방국가의 지배가 일제 식민시절 우리 부모 세대들의 아픔을 보기라도 하듯 내면에 이는 파도소리가 거세다.
유럽인들의 거칠고 잡된 이기심이 이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게 하였던가. 파란 눈의 그들이 짊어지운 노역들. 말레이 본토인들에게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 함께한 공간에서 호흡이 순탄하기만 했을까. 강자의 힘이 약자에게는 엄청난 힘으로 작용했으리라. 아픔 위에 슬픔이 새겨진다. 이렇게 고된 역사를 겪었음에도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 세계인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인도출신의 미국 철학자 호미 바바(Homi Bhabha)가 식민 문화에 대해 “하나로만 똑같아 지거나 전체적으로 포섭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문화적 혼종성을 얘기한 것이 수긍이 간다. 어쩔 수 없지만 유럽의 좋은 부분을 끌어안은 것이 아름다움으로 작용한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을 여행하다가도 문화적 혼종성을 느낄까. 일본문화의 순기능이 있을지라도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페낭은 다른 나라라 객관적으로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혼종성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혼종성은 생각하기도 싫다. 아니라고 우길수록 쓸쓸하고 화가 난다.
뾰족이 날 세운 마음을 잠재우려 계속 해변을 걷는다. 시간에 분노의 정지화면을 요구한다. 눈앞에 다시 도시가 들어온다. 차도는 넓으나 인도는 고샅길이다. 구불구불한 역사와 구석구석 살피는 재미를 길에 남기고 미로를 빠져나간다.
마음 따라 물빛이 달리 보이는 바다처럼 다양함을 곁들인 도시, 아픔을 극복하고 깊은 역사를 품에 안은 도시, 보석 중에도 은은한 진주라 불리는 페낭, 이 도시의 역사는 오늘도 살아 숨 쉰다.

#2. ‘그을린 사랑’을 뒤집다.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이삼백 년 이상 된 옛 시가지의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2층짜리 건물들. 1층은 상가, 2층은 가정집이다. 건물 외형만 보면 드난살이하는 살림처럼 초라하고 어수선하지만 도시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는 차분하다. 고요함이 깔린 내면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최초에 자리 잡은 부족들은 아마 인도인과 중국인, 말레이 본토인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리 곳곳마다 ‘리틀 인디안’ 팻말과 그들의 힌두교 사원, 거대한 중국식 절, 서양식 성당과 교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다정한 친구 같아 보인다.
이슬람민족들이 같은 종교지도자, 무하마드를 믿으면서도 무하마드 사후 후계자의 정통성 문제로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또 무슬림과 기독교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중동지역. 그곳과는 사뭇 다르다.
순간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중동 레바논의 한 가톨릭 집안의 여자 ‘나왈’과 전쟁 난민 무슬림 남자 ‘와합’과의 러브스토리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왈의 형제들이 와합을 무참히 살해하는데 슬프게도 나왈은 임신한 상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커가면서 전쟁광이 된다. 나왈은 기독교인들의 무자비한 무슬림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크리스찬 민병대 대장을 학살하고 크파리앗 감옥에 투옥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들 니하드는 엄마가 있는 감옥의 사형집행인으로 온다. 악랄하기로 유명한 그는 엄마인 줄 모르고 나왈을 강간해서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난다. 나왈이 죽기 전에 두 아이에게는 친형제이고 동시에 아버지인 니하드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겨 어머니의 유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한 남자를 무참한 죽음으로, 한 아이를 죄에 물든 어둠 속으로, 한 여자를 가혹한 운명으로,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쌍둥이들에게 새로운 가족관계를, 아버지가 곧 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끔찍한 참상을 보게 된다.
영생과 구원이라는 종교의 본질과는 먼 대척점에서 구원이 아닌 구속을, 영적 평화가 아닌 육적 괴로움을, 깊은 괴리감과 처참한 아픔을 주면서, 종교라는 이름의 흰옷을 걸치고 중동의 모래밭을 붉게 물들인 그들과는 달리 이 도시는 평온하다. 영화처럼 할퀴고 찢겨놓은 그을린 사랑을 만드는 지역이 지구 곳곳에 있는가하면 ‘화염, 전란, 격한 감정의 폭발('Incendies)’이라는 원제와는 정 반대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드는 도시도 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없어야 된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 주는 듯하다.
흔히 자기 종교만이 옳고 자기종교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아우성 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달리 페낭은 다른 사람과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줄 아는 도시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방인들이 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이곳이 어색하지 않다. 덕지덕지 낡은 옷을 걸친 것 같은 겉모습이 낯설지 않다. 고물거리고 부드러운 속살을 지닌 내면,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는 <그을린 사랑>을 뒤집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