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파가 될 수 있을까
장금식
묘지 앞에서의 느낌이란? 언젠가 이런 곳에 누워 쓸쓸하게 지낼 고독감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누가 믿겠는가. 이곳의 묘지는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공간이 흙으로 메워진 곳이 아니다. 멀리 외딴곳에 버려진, 고독의 깊이와 넓이가 어마어마한, 유폐된 섬이 결코 아니다.
중천에 뜬 태양은 느릿느릿 몸을 흔들고 겨울새 몇 마리가 드높은 하늘을 가른다. 나는 지금 파리 14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몽 빠르나스(Mont Parnasse) 묘지 앞에 와 있다. 갈팡질팡 갈등하며 뒷걸음질 치던 내 의식, 짙고 어두운 내 마음과는 달리, 밝은 햇빛 한줄기가 한나절의 기운을 일으켜 세운다.
들어오는 입구까지는 묘지를 만들고 다듬기에 필요한 물품들을 파는 가게가 늘어져 있다. 꽃집과 골목골목 눈에 띄는 카페가 어두운 분위기를 바꾼다. 봄꽃처럼 화사하다.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잠들어있는 이곳, 크고 작은 나무들과 예술작품처럼 예쁘게 조각 해 놓은 묘지들, 그리고 추운 겨울인데도 산책 나온 사람들의 한가로움이란 프랑스 묘지에서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다.
묘지에 들어서자, 우측 100미터쯤에 장 뽈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시몬느 드 보브와르(Simone de Beauvoir)가 나란히 누워있다. 묘 앞에 놓여있는 작은 화분들. 시클라멘, 바이올렛, 프리뮬러 꽃들이 산자와 죽은 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듯 바람에 살랑인다. 묘지와 묘지를 잇는 사이사이, 도시의 스산한 바람이 태양의 빛에 스며들어 차가운 묘지 안 깊은 곳까지 온기로 데우기 충분한 듯하다.
길이 밝기만하다. 익히 들은 대로 분명 이곳은 슬픔의 장소가 아니다. ‘죽은 자들의 안식처’ ‘명상에 잠기는 공원’ ‘산자와 죽은 자가 공유하는 휴식처’로 불리는 곳이다. 묘지를 대하는 프랑스인들의 문화에서 붙여진 이름, 그 이름들이 어느덧 낯설지 않다.
사르트르 묘지에서 한참을 직진하다 좌측으로 돌아 조금 거닐면 <악의 꽃>의 저자,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묘지가 있다. 시인이 인기가 더 많은지 화분과 꽃다발이 훨씬 많이 놓여있다. 기념할 수 있는 소품들과 애정이 담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직도 고도를 기다릴 것 같은 사무엘 베케트, ‘신 여자의 일생’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 모파상, ‘대머리 여가수’가 대학로 극장에서도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듯한 이오네스코 등 글로만 만났던 문학의 거장들도 만났다. 묘지에 있을수록 음산함이 사라진다. 이곳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파리지엔의 일상에 동화된 느낌이다. 파리에는 몽 빠르나스 말고도, 20구에 뻬르 라쉐즈(Pere-Lachaise)와 19구에 몽 마르트르(Mont Martre)등 크고 아름다운 묘지가 더 있다. 파리사람들에게 이 묘지들은 생활과 함께 산책하는 공원임에 틀림없다.
마침 돌아 나오는 길에서 그날따라 우연히 운구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관을 내리고 위치를 맞추고, 잘 맞지 않자 양쪽 끝에서 네 사람이 잡고 있던 끈을 여러 번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땅을 파서 하관을 하고 흙을 덮지만 이곳은 관이 완전히 안착되자 묘지의 뚜껑을 덮고 기도를 한다. 관이 들어갈 수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집 같았다. 뚜껑은 지붕역할인 셈이다. 흐느끼는 곡소리가 없다. 아무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엄숙했다. 미동 없이 숙연하기만 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안과 겉>에 나오는 노파의 행동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야 풀렸다. 죽기 전, 묘지를 사놓고 일요일마다 묘지 안에 들어가 누워보고 또 기도를 드리고 나오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묘지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주저함 없이 발을 들여 놓았으리라. 들락날락 하는 동안 무수히 그려지는 감정들, 그녀에게 죽음이 공포였을까.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까뮈는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 안과 겉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둘을 분리하지 않고 두려움에 앞서 철학적 관조로 ‘죽음’을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나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날마다 무덤을 파는 사람,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 그러다가 그 노파처럼 매일 무덤을 들락거려보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가야한다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무덤 앞에서 “삶을 절망해보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삶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 같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으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파리에서 묘지기행을 하며 본 하관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떠오른 그 노파는 적잖은 충격으로 와 닿았다.
과연 나도 언젠가 그 노파처럼 죽음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을까. 무의식적이나마 죽음이 공포로만 여겨지지 않았을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두려움만 앞서 있었을 게다. 많은 철학자들이 ‘삶=죽음’이라 하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모든 사람에게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인데도 무의식중에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는 말도 죽음을 대비해야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몽 빠르나스 묘지에 들어갈 때와 돌아 나올 때의 묘지를 향한 내 시선이 다르다. 묘지는 땅 속 깊이 잠든 이들에게는 평화를 누리는 곳이고, 산책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평화를 얻는 곳이다. 죽음이 산자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묘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위안을 준다는 것을.
봉분으로 된 한국의 묘지는 대개 산 속에 있어서 가족으로부터 유폐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묻힌 영혼들은 가족과 늘 함께 호흡하는 듯했다. 문득, 죽는다는 것이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놀이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일정한 순간 열정적으로 살다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죽었다가, 영원한 안식이 무료하면 또다시 지상의 삶으로 돌아와 사는, 주기적으로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는 그러한 삶과 죽음은 불가능한가. 스스로 묘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아름다운 묘지, 몽 빠르나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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