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고르드의 시간들
장금식
잘 나가는 증권회사 펀드 매니저인 맥스가 도도하고 매력적인 남프랑스 여자 페니 샤넬과 사랑에 빠진다. 고향 고르드에서다. 원제는 <A good year>, <어느 멋진 순간>으로 번역 개봉된 영화에서 두 남녀의 좌충우돌 사랑이 펼쳐진다. 영화 내용으로 본다면 ‘포도농사가 잘 된 한 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맥스는 헨리 삼촌이 남긴 유산, 포도밭 딸린 저택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르드로 간다. 일중독에 빠진 도시 남자 맥스가 ‘돈이냐, 자유로운 삶이냐’의 선택 앞에서 인생의 진정성을 발견해 나가는, 유쾌 발랄하고도 멋진 이야기이다. 도시를 떠난 새로운 삶, 넓고 푸른 와인 농장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고품격 로맨스. 풋풋하면서도 잘 숙성된 와인의 향이 느껴지는 그들의 사랑에는 낭만과 여유가 듬뿍 담겨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영화를 봤다. 이번 프랑스 여행 중엔 고르드의 와인을 마셔보리라 마음먹었다. 아비뇽에서 출발하여 고르드로 향한다. 안내팻말이 보이기 시작하자 구불구불한 산길이 나타난다. 영화에서 본 마을을 그려본다. 드디어 고르드 마을의 높은 언덕 위에 섰다.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중세마을과 포도밭, 그리고 영화의 장면들이 겹치니 마음이 설렌다. 이곳에서 꼭 ‘나의 멋진 순간’을 만들어보리라.
골목길로 접어드니 긴 돌담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돌담 사이사이에서 풀들이 고개를 내밀며 반긴다. 은은하고도 상쾌한 라벤더, 새콤 달착지근한 적포도, 살아 숨 쉬는 자연의 향이 햇살과 함께 어우러진다.
촘촘히 박힌 자갈길을 지나 마을의 중심가로 접어든다. 높은 성, 작은 교회, 낮은 담, 아기자기한 기념품 숍도 모든 게 돌로 되어있다. 정겹다. 영화에서 맥스가 자동차를 타고 수없이 뱅글뱅글 돌던 그 동상, 어린아이의 동상도 보인다. 반갑다. 프랑스를 위해 죽은 고르드 아이들을 기리는 추모동상이라 적혀있다. 라벤더 상품, 옷, 조각품과 미술품 등이 진열된 가게가 늘어서있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장식한 레스토랑도 눈길을 끈다. 멋진 카페들까지, 옛 것을 버리지 않고 멋스럽게 재탄생시키며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 12시에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숙연해진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은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하다. 포도밭 전경을 보니 와인 생각이 절로 난다. 영화 속 레스토랑을 찾아보지만 낯선 길이라 힘들다. 자그마한 레스토랑에 들러 스테이크를 시키고 남편과 와인 잔을 부딪친다.
영화 속 그들. 처음부터 끝까지 와인을 마신다. 혼자서, 둘이서, 여러 명이 모인 파티에서 와인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잔을 살짝 흔들며 향을 맡는다. 한 모금 입에 넣고, 눈을 지그시 감고 맛을 음미한다. 그들이 마시는 대로 우리도 흉내를 내본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와인, 오랜만에 마신다. 이름도 모르고 마신다. 맨 처음 맛본 와인의 추억, 성당에서다. 영세를 받을 때 신부님이 성체를 백포도주에 적셔주었던 그날, 내가 새로 태어나는 듯한 날이었다. 성스러웠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우리 둘이 고르드에서 마시는 와인엔 부부의 시간과 고달프거나 행복했던 삶의 향이 담겨있다. 맛을 음미하기보다 분위기를 마신다.
영화 속 최고의 와인 ‘템피에 벤돌 1969’라 생각해본다. 와인의 종류가 무려 1200개정도나 된다고 했던가. 하루에 세 가지씩 맛을 본다 해도 1년이 부족할 지경이다. 그 맛에 대한 표현 또한 얼마나 형형색색일까.
맥스가 어렸을 때 헨리 삼촌과 나눈 대화가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우리의 여행도 무르 익어간다. 삼촌은 말했다. 와인은 “한 모금만 마셔도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는 미스테리를 갖고 있다.”고.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거나 하지 않고 와인은 언제나 네 입술을 끊임없이 말을 하게 하지. 아주 태연하면서도 정직하게 말이다.”라고. 와인에 대한 삼촌의 철학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헨리 삼촌의 또 다른 팁 하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품위를 지키는 법에 관해서다. 어린 맥스가 삼촌과의 테니스 경기에서 지고 분노를 조절할 줄 모르자 말한다.
“맥스야, 패배를 인정하렴. 품위 있게 즐기는 게 바로 승리다. 사람들은 승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지만 패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깨닫게 하지. 최소한 패배가 승리보다 더 즐길만하다는 것. 때로는 패배할 수도 있단다. 그렇다고 불행해져선 안 된다. 기억해라.”
우리의 삶에 위안을 주는 말이다. 어떤 이는 와인이 위로를 주는 ‘신의 물방울’이라고도 한다. 튤립모양의 와인 잔이 쨍하고 부딪치며 내는,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깊고 오묘하다.
프랑스인들에게 와인은 문화 그 자체이며 관계의 주인공이다. 사람마다 제각각 성격이 다르듯이 프랑스 와인도 종류에 따라 고유한 풍미를 갖고 있다. 지역과 제조방법, 포도품종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보르도, 부르고뉴, 론, 루아르, 알자스 지방이 유명하단다. 제조방법에 따라 ‘레드와인’, ‘화이트 와인’, ‘로제와인’등이 제 색깔을 자랑한다. 식사하며 마시는 종류도 다양하다. 전식, 본식, 후식 와인이 따로 있다. 프랑스 식탁에선 와인의 질도 중요하다. 태양의 와인 ‘샤토 네프 뒤 파프’, 쉽게 구하기 힘든 꿈의 와인 ‘로마네 콩티’, 최고의 향 ‘샤토 까농’, 와인의 왕 ‘부르고뉴 와인’, 와인의 여왕 ‘보르도 와인’ 등 그 격에 따라 초대한 사람의 품위가 정해지기도 한다. 식탁에서나 모임을 시작할 때 프랑스인들은 와인에 대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어간다. 그만큼 포도주와 함께 사는 그들이다.
어설픈 프로방스인이 된 우리부부는 쉬어갈 겸 런치 타임 2시간 이상이나 와인을 음미하며 영화 속에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아가듯 고르드에서 보낸 시간들이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고품격 로맨스, 행복 바이러스에 전념된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낮의 태양은 뒤로 물러나있고 주변은 붉게 물들어있다. 고르드의 일몰, 그 마법에 빠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인간이 즐기는 혀의 천국” “슬픈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신비의 힘”이라는 와인, 그 마법에서도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다.
석양에 물든 자연풍광과 드넓은 포도밭을 다시 바라본다. 땅이 척박할수록 포도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물을 끌어올려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한다고 한다. 영양분이 없는 땅에서도 스스로 양분을 찾아 깊게 뿌리를 내린다니, 어려운 삶일수록 치열하게 자신을 단단히 다지며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게 아닐까. 우리의 남은 시간들이 묵은 포도주처럼 숙성되길, 향기롭길, 마음속 깊이 새기며 리옹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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