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19년 [인간과 문학] 겨울호. <작가재조명>에 실린 허상문 교수님의 '장금식작품론'

율리안나 2020. 1. 30. 11:41

고통의 서사 혹은 희망의 글쓰기

―장금식의 수필 읽기

허상문

1.

삶에서 고통은 주체의 소멸은 물론 주체와 타자의 분열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새로운 윤리학을 요청하게 된다. 그동안 동서양의 수많은 문학은 개인이 직면한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발화해 왔다. 실로 문학에서의 진정한 구원은 낯선 존재로서 타자와의 대면과 그 고통의 극복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우리는 모두 교환하고 차용하고 서로 상대의 생각을 훔치기도 하면서 거의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제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이란 자아는 물론 타자를 향하여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감정이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자취 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홀로 남게 된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여기서 쿤데라의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것은, 장금식의 수필집 《내 들판의 허수아비》(북나비, 2015)와 《프로방스의 태양이 필요해》(나무향, 2017)에 나타나는 나와 타자, 절망과 희망, 어둠과 빛의 경계를 무화無化하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실존의 근거이자 표징으로서의 ‘고통’에 대한 자각이다. 장금식은 자신이 바라보는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슬픔’이라는 정서적 재현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이 슬픔의 분위기가 그의 문학과 삶의 역동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장금식의 수필 세계는 부조리한 삶의 상황 속에서도 존재에 대한 자각을 통해 언젠가는 새로운 삶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그의 수필은 상반되고 이중적인 본성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삶의 본질적 의미를 모색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다분히 비극적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생에 관심 없는 사람이 암중모색하는 듯한, 혹은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던지는 듯한 사유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고통스러운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사유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텍스트 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독자를 이끌어가는 친절한 화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간 곳곳에 숱한 비의秘義를 던져 주고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장금식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안주적인 습관이나 고정된 관념을 회피하거나 대립한다. 통념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글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지만, 이를 위배하고자 하는 글쓰기는 그 행간에 무수한 의문부호를 제시한다. 온몸과 마음의 통점痛點에 부딪혀오는 그것은 명백히 ‘고통’으로 느껴진다. 고통 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단순하고도 힘든 아픔이다. 이같이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는 고통의 주체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주체와 타자는 서로 배반하게 되고, 주체는 타자와 갈등하고 상처를 입는다. 장금식의 수필들은 바로 상처와 고통의 근원을 찾아가는 통로이다.

2.

방금 시사한 대로,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올바른 문학은 어떤 보편적 문제의식과 문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의 추구가 담겨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보편적 문제의식이란 주체와 그가 직면한 고통의 원인으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좋은 작가는 주변의 인간과 세상을 단지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고투하고 그로부터 얻어낸 진실을 새롭게 창조해내고자 한다. 세상에 널려 있는 온갖 작은 삶의 파편들로부터도 새로운 진실을 조합해낸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수필을 쓰는 기술이란 타자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기술과 다르지 않다. 주체의 삶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타자의 철학자로 알려진 E. 레비나스의 관점을 살펴보는 것은 유효하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부정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주체와 타자의 대안적 관계, 나아가 새로운 윤리학을 모색하는 전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삶의 내용을 향유하는 존재의 고통은 주체에서 벗어나 더 높은 단계의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주체와 타자는 고통의 경험을 매개로 하나의 자리에서 조우하며 그것이 관념적 차원이 아닌 구체적 현실 안에서 작동하는 윤리학으로 정립할 수 있게 된다. 고통에 직면한 주체가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대신,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의 얼굴 또는 타자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자신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장금식의 수필집 도처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수필집 《내 들판의 허수아비》에 나오는 〈수필집을 내면서〉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하얀 설산에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대자연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을 맘껏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설산이 사랑의 묘약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았습니다.

따뱅이 위에 어머니의 삶을 엮어 보았습니다. 질곡 같은 어머니의 삶이 아픔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무거운 짐이자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고통으로 각인된 그 짐과 기억이 이제 구름 꽃이 되어 치유되었습니다.

―〈수필집을 내면서〉 중에서

작가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먼 바다에서 삶의 표면과 내면을 동시에 바라본다. 또한, 욕망의 불빛을 오랫동안 감추고 살아오면서 어둠 속에서 별빛을 읽어내고자 한다. 그 빛을 따라가 보면 반딧불과 같은 지상의 별이 보인다. 두 권의 수필집에서 장금식은 인간과 세상의 고통에 대한 속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인간이 당면하는 고통은 그의 수필집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수필의 기본 문법 중 하나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오랜 삶의 체험에서 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유학 체험에서 낯선 곳 낯선 사람과 만나 모국어가 아닌 말로 대화를 나누게 되지만, 그는 그러한 삶의 상황에서도 진실한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줄곧 생각한다. 자신에게 학위가 삶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리도 집착하나로 외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지금은 고독도 추억으로 돌릴 만큼 담담해져 있지만 지나간 삶의 편린을 관조하며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이 내적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인정한다. 작가에게는 파리에서 맛보았던 허무한 시간이 있었기에 길고 긴 고독을 녹여낼 힘이 생겼고, “타인의 의식이 들어가지 않은 고독. 긴 침묵에서 생긴 고요의 세계. 그녀의 에고와 타인의 에고가 사라진 저 너머의 세계에서 참되고 순수한 고독”(〈회색 하늘〉 중에서)을 누리게 된다. 말하자면 작가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히려 내 안의 어둠이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와 타자는 함께 바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작가는 인생의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나가게 된다.

작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런 인식은 더욱 구체화된다. 어머니의 삶을 상징하는 ‘따뱅이’를 통해서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루게 된다. 따뱅이는 어머니를 그렇게도 강하게 내리누르던 삶의 짐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다. 그것은 곧 자식에 대한 질긴 사랑이며, 그 사랑으로 삶의 짐을 받칠 수 있게 하는 일념이다.

이렇게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따뱅이가 있었기에 다섯 자식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었고 삶의 쓰라린 아픔을 모두 견뎌낼 수 있었다. 어머니도 제일 소중한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따뱅이 위에 앉아 쉬고 있는 어머니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따뱅이는 닳고 닳아 흐물거린다. 어머니의 힘든 삶도 세월 속의 풍화로 먼 산에 하얗게 피어나는 바람 꽃이 되어간다. 질곡 같은 어머니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어머니의 따뱅이를 보며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꾹 삼키고 돌아왔다.

―〈따뱅이〉 중에서

어머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체화하는 고통의 서사를 통해 작가는 고통이 주체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편입되는가를 바라본다. 또 주체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면서 자신을 재구성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경험이며, 그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주체성의 핵심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은 주체는 항상 타자에 대해 노출된 상처받을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글을 쓰거나 기억 속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상처를 확인하게 된다. 상처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속의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의 저편’으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의 표식일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상처는 작가의 삶과 정체성을 바라볼 수 있는 유력한 준거 틀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에서 작가 자신의 진정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상처를 찾아 열린 주체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주체들은 각각 분열된 듯하지만, 동일한 탐구의 층위에서 견고한 언어의 자물쇠를 풀고 나아가면 결국 은폐되어 있던 ‘나’를 만나게 된다. 장금식의 경우에도 그의 작품 곳곳에서 분열된 주체 찾기의 노력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늘 알고 있지만 일희일비의 순간순간을 은근슬쩍 비켜가는 것이 또한 허허로움이다. 결코 어수룩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닐 터, 팍팍한 현실을 조금 부드럽게, 여러 번 문질러 보지만 손에 남는 것은 아픔뿐임을 훤히 꿰뚫고 있는 받아들임이다. 미움과 분노라는, 인간의 제일 끝 감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용서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 셈이다.

―〈신新 처용가〉 중에서

현실이 그려 놓은 그림자를 늘 꿈속에 숨기며 살아왔듯이 오늘의 진부한 삶이 자유를 향한 굴레가 아닌 통로로 뚫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씩 나만의 공간을 만들면서 말이다. 지향점만 갖고 있다면 지금 주어지는 이 공간이 바로 나의 이상향, 살아있는 왕국, 파라다이스가 되지 않을까.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달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하는 달세계를 새로운 풍경으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짧은 여행〉 중에서

〈신新 처용가〉에서 작가는 지난했던 자기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삶이 손에 남는 것은 아픔뿐이라고 생각해 본다. 온갖 풍파와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써서 이제는 본 모습이 어떤 미움과 분노라는 인간의 제일 끝 감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용서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상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 속에서 껍질을 얼마나 더 벗겨내야 참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짧은 여행〉에서 삶은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달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하는 달세계를 새로운 풍경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작가가 자아의 분열과 상실을 아파하면서 본질을 모색하고자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삶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일수록 그의 작품은 현실에서 분리된 자아의 내면에 대해 더욱더 깊은 탐색을 이루고자 한다. 장금식은 여러 작품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자신을 대리시키고, 더 나아가 그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강렬한 내적 욕구를 보여준다.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끊임없이 찾고자 한다.

3.

삶에 대한 구체적 사유를 위해서 장금식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모색한다. 흔히 타자는 자아의 상대적 개념으로만 생각하지만, 인간의 대사회적 관계를 생각한다면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대상은 나의 타자가 된다. 타자는 사실상 나의 건너편에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에 무 세계적 주체란 있을 수 없고, 타자 없이 완전히 고립된 자아도 있을 수 없다. 장금식의 작품에서도 타자는 단지 자아의 건너편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에 억압된 채 부재하지만 존재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존재이다. 작가는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통하여 자신을 바라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도 허수아비는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의 지킴이로 남으리라. 오늘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 며느리, 친정 엄마의 딸이라는 직함으로 내 가정의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의 삶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내 생生의 들판에는 크고 작은 참새 떼가 많았다. 이럴 때 내 잠자는 영혼을 다시 한 번 일깨운 허수아비. 훠이 훠이, 참새를 쫓는 묵언의 함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그 음성을 기둥삼아 내 정신의 들판이 황금빛 생명의 물결로 출렁일 수 있기를 빌어본다.

―〈내 들판의 허수아비〉 중에서

현대인은 모두가 힘겨운 삶의 현실에서 분열되고 불안한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들에 대하여 깊은 윤리적 관심과 사랑을 보인다. 타자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 없이 주체의 완전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기실 타자에 대한 구원은 작가 자신을 구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내 들판의 허수아비〉에서 작가가 묘사하는 대로 우리들 생生의 들판에는 크고 작은 참새 떼가 많다. 이럴 때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허수아비도 있다. “참새를 쫓는 묵언의 함성”과 같은 허수아비의 깨우침을 각성할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복원이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현실은 부정이라기보다는 긍정에서 더욱 새롭게 진화하고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닫고 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주체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오지 않던 부재의 타자는 새로운 존재가 되고, 더 나아가 우리는 A. 까뮈의 표현대로 “인간이야말로 인간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작가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감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로 다시 서게 된다. 주체와 타자가 서로의 세계로 안내되는 통로를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와 기억 속 상처를 하나의 풍경화로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금식에게 ‘나’에 대한 물음은 결국 삶의 현실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이다. 그리하여 그의 글쓰기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 즉 삶의 양태들이 빚어내는 개인적 실존의 구체적 떨림에 대한 탐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삶과 세상은 아무리 부조리하고 불안정한 비극이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부조리한 깊은 심연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나지 않는 한 완전히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한 가닥 희망을 건져 올리려고 늘 희미한 빛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시어머니처럼, 흙과 잡초만 무성한 빈자리에서 소소한 언어라도 건져 올리고자 한다.

손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께서는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된다며 거래를 바꾸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저녁 달빛에 감추고 살면서도 자식이 있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건져 올리려고 늘 희미한 빛을 찾아 다가가며 살았다.

그런데 그 빛은 다시 어둠이 되었다. 어느 날 젊고 촉망받던 둘째 아들이 갑자기 원인 모를 암 선고를 받았다. 위치를 찾지 못하는 불명암으로 치료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청천 벽력같은 현실은 눈보라 치는 겨울밤보다 더 추웠고 밝은 보름달을 봐도 빛이 없었다.

―〈항아리〉 중에서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진한 인연으로 서로 만난 남편이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새삼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한 쪽이 먼저 죽으면 보고 싶다고 애타게 불러 봐도 빈 하늘의 메아리만 남을 텐데. 함께 걷던 길로 다시 가도 흙과 잡초만 무성하고 뎅그러니 빈자리만 있을 뿐이리. 금방 피었다가 시들해질 틈도 주지 않는 구름 꽃, 바람 꽃, 얼음 꽃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더 늦기 전에 빛바랜 편지지에 소소한 언어라도 빚어내야겠다.

―〈미투리〉 중에서

작가는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후회하기보다는 함께하는 사람과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진한 인연으로” 살아가는 것에 행복과 희망을 걸어 본다. 이 이야기는 현재 인연의 소중함과 인간에 대한 희망을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염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의 마음을 거듭 드러낸다. 이런 마음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영성의 표출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구름의 생성生成과 사멸死滅, 만다라 그리기의 과정과 모래 쏟아 붓기는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순수한 천연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티베트 승려들은 득도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만다라를 만들고 지웠을까. 저 하늘의 구름은 대자연의 순리를 수없이 반복하였을 터, 나는 얼마나 많은 욕심을 모래처럼 구름처럼 쌓고 지워버렸을까. 구름과 만다라처럼 삶을 만들고 다듬고 조각하다가 부지런히 지울 수 있기를. 또 새롭게 만들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구름의 형상〉 중에서

화자는 솔밭에 누워 하늘에 흩어진 ‘구름의 형상’을 보면서 생성과 사멸을 담고 있는 만다라의 모습을 본다. 구름과 만다라처럼 삶을 만들고 다듬고 조각하다가 부지런히 지울 수 있게 되고 세상의 모든 물사(物事)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몰아와 무심의 경지로 들어서기를 빈다. 더 나아가 작가는 문득 이름 모를 들꽃을 바라보면서 일상을 벗어나기, 멀리서 바라보기, 한 템포 늦추기의 시간을 가지려고 피정(避靜)을 떠나기도 한다(〈피정〉).

종교적 영성은 인간 본성의 하나인 욕망의 실체가 무겁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주체하기가 힘들고 내려오는 길은 아찔하다. 잡으면 놓기 싫은 모든 세속적 욕망을 되돌아보고 깨우침을 주는 것은 종교의 힘으로 가능하다. 작가도 욕망의 늪에 유기된 사람을 구하고 새로운 샘물을 부어주는 것은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가 자신을 일깨운다. 작가에게 종교적 영성은 스스로를 일깨우는 종소리와 같다.

이제 작가는 파리에서 묘지 기행을 하던 중에서 본 하관 장면에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으면서,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진지한 물음을 묻는다. 인간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대해서도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화자로서는 노파의 죽음에 대하여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된다. 과연 우리가 저 노파처럼 죽음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부인치 않는다면 죽음이 산 자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놀이로 받아 들일 수는 없을까. 일정한 순간 열정적으로 살다가, 좀 쉬고 싶 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죽었다가, 영원한 안식이 무료하면 또 다시 지상의 삶으로 돌아와 사는, 주기적으로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는 그러한 삶과 죽음은 불가능한가. 스스로 묘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아름다운 묘지, 몽 파르나스에서.

―〈그 노파가 될 수 있을까〉에서

카뮈는 삶과 죽음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이 안과 겉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둘을 분리하지 않고 두려움보다는 철학적 관조로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작가는 “날마다 무덤을 파는 사람,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 그러다가 그 노파처럼 매일 무덤을 들락거려보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마침내 작가는 무덤 앞에서 “삶을 절망해보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삶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불가역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화두이지만, 작가는 죽음을 통해서도 절망과 어둠보다는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금식은 타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삶을 소중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에게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일러준다. 화자가 ‘그 노파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누군가’라는 타자의 삶에 진실로 다가가지 않으면 쉽게 답해질 수 없는 질문이다. 장금식 수필의 진실은 말로 표현되는 것을 넘어서 삶의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데 있다.

4

작가의 세계인식은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작가의 문학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탈근대 이후 인간은 이성과 지식에 대한 믿음만으로 자기완성을 지향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한없이 소외되고 분열되는 내면적 존재로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주체의 주체성과 타자의 타자성을 찾는 작가들은 인간의식의 이면을 탐색하고, 삶의 슬픔과 고통에 위배하는 자신들의 언어를 찾고자 한다.

장금식의 문학은 새로운 존재론적 방식으로 일상적이고 관습화된 글쓰기의 의미를 성숙하게 위반한다. 서사문학이 주체의 존재 방식을 통해 세상을 번역해내는 통로라고 한다면, 장금식의 수필은 행복에의 환상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그동안 꿈꾸어 오며 치른 대가가 얼마나 남루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기억 속에 담긴 쓰라린 상처와의 싸움, 남루한 일상에 대한 거부, 주체에 맞선 타자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통해서 그의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론으로부터 삶과 세상에 대한 의미론으로 확장된다. 존재에 대한 고통이 없는, 다시 말해 실존을 위한 진지한 내면적 성찰의 디딤돌이 될 수 없는 수필은 그저 처량하고 누추한 신세 한탄에 그치는 언어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장금식은 오늘도 새로운 세상과 인간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다시 무언가를 기다린다. 이는 곧 희망에 대한 또 다른 절망이며 슬픔에 대한 또 다른 고통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실존의 몸짓, 그러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장금식 글쓰기의 서사 문법이다. (끝)

허상문(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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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문학평론집으로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오디세우스의 귀환》, 영화평론집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영화》, 기행산문집으로 《오디세우스의 유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서》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