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6년 [수필미학] 여름호에 신작에세이 <리모델링> 발표

율리안나 2016. 6. 11. 15:09

리모델링
장금식

겨울 낙엽은 땅 속 어딘가로 유랑을 떠났다. 새순이 기지개를 편다. 낮달을 품으며 잎을 피운다. 가지를 부여잡고 초록 숲을 이룬다. 밤 달, 달무리에 일렁이는 바람에도 불을 밝힌다. 초록 잎은 제 몸을 곧추세운다.
풀이 죽어 시들어 가는 잎과 같은 아이들이 있다. 비영리 사회복지 단체인 '러빙핸즈(Loving hands)'와 '초록리본 도서관'이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이 아이들을 보살핀다. 제자 중 한명이 이 단체의 대표이사다.
학생 때 착한 모습 그대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었구나 생각했다. 생계를 겨우 꾸려가는 급여이지만 음지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이 되어주는 제자가 자랑스럽다. 앞만 보며 달려온 내 삶을 거울로 비춰보기가 민망하다. 지난날들의 허점, 옆을 보지 못한 오류. 무엇을 고쳐야하나?
폭염과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부끄러움으로부터 달아나고자하는 열망은 빠를수록 좋다. 구질구질한 나를 철거하는 작업이다.
이기에서 이타적 삶으로의 전향이라면 너무 거창하다. 부실한 곳이 어딘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명줄에 금이 가거나 누수, 과부하 상태는 없는지 안전점검이 우선이다.
식욕에 얽매여 있었듯 내면의 벽이 남루하다. 커피, 주스, 김치 국물 튀겨진 자국이 점점이 박혀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아끼지 않고 맘껏 먹었다. 주식보다 후식을, 밥보다 빵이나 케이크를, 그것도 초코릿무스에 아메리카노를 즐기며 욕구 채우기에 자강불식自强不息. 저편에 있는 누군가를 생각해볼 겨를 없이 한사코 주저함이 없었다.
올망졸망 붙어있는 장신구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갖고 싶은 물욕을 억제하지 못한 무절제하고는, 헉! 거실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잠자고 싶은 욕구를 견디지 못해 빠른 손놀림이 닿지 않아도 건강이 우선이라며 게으름을 뒤로 물린다. 글을 쓰느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처럼 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자아실현 욕구까지. 완벽, 치밀, 무결점, 무실수는 또 어떠랴. 모난 성격들끼리 헤게모니 싸움이라도 한 듯 상기된 외모는 후끈거린다. 팔자주름, 눈가주름, 찡그린 얼굴에 침침해지는 눈, 떨어지는 청력, 수시로 잘못 작동되는 입. 내외적으로 버리고 고쳐야할 게 많다.
걷어낸 욕구와 몸속 쌓인 노폐물을 담아 놓은 쓰레기통은 배가 불룩하다. 줄무늬 외피를 당겨 혐오감을 없애고, 잃어버린 탄력을 되찾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교정하기까지 견적과 예상 소요시간이 나오는데 휴~. 거미줄같이 얽힌 욕구를 삭이며 독성을 지우려면 매일 무릎 꿇고 엎드려 성체조배나 백팔 배를 드려도 부족할 것 같다. 의식의 놀라운 변화가 그리 쉬울까.
아날로그적 단편시선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나를, 너를, 우리를 볼 수 있는 디지털 눈으로 시력 회복하기. 폐쇄회로 TV(CCTV)를 장착한 눈으로 마음을 읽고 신호를 보낸다. 비오는 소리, 사뿐사뿐 눈 내리는 소리, 세상 소식을 몰고 오는 바람소리를 놓치지 말라는 알림. 잊지말아야할 사람을 떠 올리고, 그들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남이 말을 할 때는 손바닥으로 귀 볼을 가지런히 모아 청력을 확장하는 일. 갈수록 실언이 잦아지는 몹쓸 습성에는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까보다.
오작동 차단용으론 그래도 침묵의 두루마리가 최고! 욕구를 둔화시켜 삶의 질은 높이고, 위기는 줄이고, 건강에는 청신호를 가져다 줄 두루마리로 도배와 장판만 다시 해도 확 달라 보일 게다. 곤두박질치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부끄러움만이라도 면하면 만족이다. 약을 먹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 갈 횟수를 줄이는 것만도 어딘가. 며칠 입은 옷을 벗고 맨몸으로 있다가 새 옷을 입은 마네킹이 된 듯하다.
내 품격의 자산 한도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잠자는 의식을 일깨워 고품격 창조적 변신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욕구를 허문 빈자리에 풀꽃향기를 담고, 눈부신 햇빛 한 줌 앉히며 풀벌레 소리도 불러온다.
욕구와 건강사이, 이기와 이타 사이에서 불필요한 무게를 줄여 인테리어 한 덕에 창틀 자욱했던 먼지가 사라졌다. 새 틀과 새판을 짰으나 리모델링의 완성, 화룡점정은 부실공사로 인한 잦은 보수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새 틀과 새판의 ‘새’자는 remodeling의 ‘re’접두사인 ‘다시 ~하다’와 같은 각오와 설렘을 담고 있다. 행여 ‘새’와 ‘다시’ 사이가 삐끗하거나 저릿하고 뻐근하여 또 다른 개조와 맞닥뜨릴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새, 다시, re'의 단어가 분해, 해체되는 일이 없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여주기가 아닌 소통의 창을 여는 마음으로 건조함을 촉촉이 적셔줄 감성 리모델링을 했다고 제자에게 말해볼까. 빙그레 웃으며 박수를 쳐 주려나.
초록리본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위해 글쓰기 지도를 부탁 받았는데 자격이 되는지를 거듭 자문하며 쑥스러움을 면해야겠다. 재능을 기부하는 연예인은 못되어도 제자의 러빙핸즈를 잡아줄 손이 되면 좋겠다. 부끄럽지 않은 손이 된다면 그야말로 남은 삶은 넝쿨째 굴러온 횡재가 아니겠는가.

몸을 곧추세운 초록 잎들! 강변을 푸르게 물들이고 흔들리는 바람에 제 몸을 길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