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2016년 [선수필] 가을호-'프랑스 문화여행'에 신작 에세이 <노트르담의 종소리>발표

율리안나 2016. 8. 23. 23:38

프랑스 문화 여행

노트르담의 종소리
장금식


겨울인데도 바람결이 봄처럼 온화하다. 이곳이 낯설지 않다. 27년 만에 다시 찾은 도시, 파리는 변한 게 없다. 바람처럼 고향을 훌쩍 떠나왔던 그때, 그 중심에 대성당이 있었다. 이번에도 파리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고 싶은 곳은 노트르담이었다. 내 오감은 잠시 주춤거리다 저 멀리 아득한 기억의 다리를 건넌다. 은은한 종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쌩 미셀 노트르담 역에서 내린다.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고답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세상을 초월하여 외딴곳에서 기도를 위한 성소로 있어야 어울릴 것 같지만 사바세계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인간의 고해를 받아주는, 노트르담 성당이다. 전 세계 관광객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드나드는 분주한 곳이다. 무려 183년에 걸쳐 완공되었다는 이 성당이 나에게는 특별나다. 이십대 후반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던 시절, 마음이 흔들리고 외로움에 지칠 때 위로받았던 곳,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던 곳이다. 내 머릿속에 내장된 기억을 확인하는 순간, 센 강도 조용조용 물비늘을 쏟아낸다.
구도자처럼 눈을 감고 두 손을 합장한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Notre Dame de Paris(노트르담의 꼽추)>가 떠오른다.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된 세 개의 아치형 문! 정교한 듯 화려한 그 문양에 내 눈은 갇히고 만다. 과지모도를 둘러싼 소설 속 주인공들의 얽혀 있는 욕망 또한 문 뒤에 숨어 있는 듯하다. 기도하는 성지가 되면서도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인 역사적, 문학적 성지임에 틀림없다.
성당 종지기 신분이면서 집시 에스메랄다에게 연민을 느끼는 꼽추 과지모도. 집시에게 탐욕을 품고 직위를 악용하여 사랑을 유린하는 부주교. 죽을 위기에 있는 집시를 구해준 근위대장.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세 남자의 애욕이 비극적이다.
과지모도는 성당 꼭대기 종탑에 갇혀 지내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래 세상이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이다. 천국과 지옥, 이성과 열정이 공존하는 사원, 성당 내부는 수없이 가보았지만 꼭대기에 있는 종탑이 무척 궁금했다. 두 개의 커다란 종을 만나러 올라갔다.
꼽추를 ‘신체적 장애가 있지만 영혼이 맑은 자’라고 한다면, 부주교는 ‘신체는 멀쩡하되 탐욕으로 얼룩진 영혼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종교의 옷을 걸치고 사악한 영혼을 감춘 자, 하얀 성전 위의 검은 괴물, 디스토피아적 악취를 풍기는 신의 사자야말로 악마의 분신이다. 탐욕은 고스란히 행한 자의 몫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신과 인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자에 대한 파멸을 경고하듯 과지모도의 종소리가 격렬한 환청으로 온다. 사회의 모순에 도전하고 인간의 천박한 본능을 일깨워 주려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소설과 영화의 장면이 순간순간 실제 노트르담과 맞부딪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시테 섬에 떠 있는 도시가 아름답다. 그 위에 나를 얹어본다. 과거엔 배움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현재는 여행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미래에는 무엇으로 나를 채울까.
외국어 강사로, 글을 쓰는 작가로 바쁘게 살고 있다. 두 가지 일 중 하나를 버리고 페달을 느슨하게 해야지 하면서도 생각에 그칠 뿐이다. 지인들은 강의를 그만두고 글만 쓰라고 한다. 돈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아 그들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을 놓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어찌하면 좋을지. 하나를 과감히 버리지 못해 흔들리는 갈등이 내 손끝과 사각형 컴퓨터 자판에서 왜바람을 일으킨다. 소설 속 인물, 부주교의 속물적 파렴치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탐욕과 내 작은 욕심이 무엇이 다를까. 최소한의 공 집합적 요소가 있는 것 같아 그 작은 것마저 지워달라고 기도한다.
내려오는 길이 아찔하다. 털 것은 털고 가벼운 몸짓으로 내려가야 좁은 계단에서 중심을 잡을 것 같다. 잡으면 놓기 싫은 이 욕심을 한번이라도 돌아보고 일깨우는 것은 내게는 문학이라는 장치이다. 그리고 그 장치가 욕망의 늪에서 유기된 자들의 비참을 거두고 그들에게 새로운 샘물을 부어주는 것은 종교가 아닌가 한다. 끊임없는 기도가 나를 일깨운다.
번잡한 마음을 씻은 기분이다.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사각형 제대 바로 뒤쪽에 있는 성모상과 십자가가 유달리 커 보인다. 이 제대는 프랑스 역사의 지난한 파고를 기억할 것이다. 백년전쟁을 겪고 영국군에게 빼앗겼던 오를레앙을 다시 찾은 이야기부터 잔 다르크의 사형선고까지. 그리고 그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샤를 7세가 주도한 재판, 나폴레옹 대관식, 드골과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미사 등 수 많은 역사가 사원의 제단과 벽면에 스며있는 것 같다.
필립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1302년 삼부회를 소집하였다던 곳도 바로 이곳이 아닌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성직자, 귀족, 시민들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 권력이란 뺏기고 빼앗는 놀이에 불과한 것 같은데 맛을 보면 놓기가 싫으니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로 무한을 꿈꾸는 자’가 아닐지. 역사 속에 문학이 있고 문학 속에 역사가 있다. 욕망의 화신과 순수한 영혼이 역사와 소설 속에 공존했더라도 지금 이 성당의 내부는 밝고 환하다.
사방의 벽을 장식한 조각상과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이 화려하다. 좀 전의 복잡한 생각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금방 묻혀버린다. 파리의 겨울바람이 이 창들을 흔들어 막 봄을 불러올 것 같은, 게다가 파이프 오르간까지 섬세한 음색을 내면 그냥 툭 건드려도 흔들릴 것 같은 마음이 요동친다. 자아와 욕망과 본성이 차츰 성찰과는 멀어지는 듯 여행이라는 즐거움이 가볍게 다가온다. 다 떨치고 떠나온, 깃털처럼 훨훨 나는 나르샤로 변모한 이 순간, 이렇게 간사한 나를 신은 이해하리라. 하모니를 이룬 천장의 굵은 선들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높은 그곳까지 날고 또 날고 싶다는 것을.
곧 파리를 떠나면 이곳은 또다시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서울에서, 노트르담은 파리에서, 서로의 길목을 지킬 것이다. 소외된 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파리 노트르담이다. 문학과 역사의 경유 없이 오늘의 유서 깊은 사원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노트르담은, 넓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고목 같고, 마음씨 좋은 멋진 할머니처럼 나에게 와 닿는다. 과거의 그림자를 투명하게 회억하는 공간에서 욕망을 들여다보게 했고, 이제 나에게는 축제의 장이 된 이 성전에 내가 조합한 언어를 조심스레 바칠 차례다.

어스름한 달빛이 뭍별에 스며든다. 쌩 미셀 노트르담 지하철역 가로등 불빛이 눈부시다. 성당 안에는 관광객들이 밝힌 염원의 촛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을 게다. 잔잔한 바람이 손을 흔든다. 귓가에 종소리가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