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시대
장금식
만능 시대다. 너도 나도 ‘만능’이라는 두 글자의 마력에 빨려든다. 만능 간장, 만능 통장, 만능 열쇠 등 성씨가 만능이라면 어떤 이름을 갖다 붙여도 만능처럼 착착 들어맞는다. 성씨가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만능 간장’에 나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 간장을 사용해야만 만능 주부가 될 것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지 않을까, 착각까지 든다. 손품, 발품 팔지 않고 쉽고 편리하게 만사를 해결하려는 내 심보가 조금 볼썽사납지만 소리 없는 압박을 어쩌랴.
반찬 걱정은 이제 그만. 가족으로부터 극찬을 기대해볼까. 조리법대로 만능 간장을 만들어보자. 이것 하나면 어떤 요리든 뚝딱 끝나리라. 간장에 돼지고기를 갈아서 볶아 넣으란다. 그 다음엔 간장, 설탕, 후추, 물을 정량대로 넣어 함께 끓이면 끝이다. 시간과 투자비용에 비해 토털 솔루션의 가치는 극대 효과를 가져 온다니 당장 오늘 저녁부터 그 간장으로 두부조림, 어묵 볶음, 가지나물, 잡채까지 해볼 요량이다.
네 가지 반찬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요렇게 쉽다니!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식구들도 모두 엄지를 치켜 올렸다. 간장의 ‘만능’이 나의 ‘전능’으로 바뀌는 순간, 마법사 같고 전지전능한 이 손으로 모든 걸 해낼 것 같은 행복감도 따라온다. 반찬 걱정과 반찬을 하기 싫은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물론, 다음 끼니의 반찬을 무엇으로 할까 열심히 궁리까지 하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닭찜, 고추 무침, 마늘종 볶음, 버섯볶음도 모두 만능 간장 요리법으로 다 바꾸었다. 나름대로 청양고추 한두 개를 추가해서 살짝 변칙을 쓰니 ‘괜찮네, 괜찮아’ 하며 연이은 찬사가 이어졌다.
만능, 만능, 만능!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사 오케이! 간장 조금, 마늘, 설탕, 고춧가루, 참기름 등 각각 따로따로 방식은 이제 노화된 설비인양 뒷전으로 물러나게 생겼다. ‘황금만능’ 시대에는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지만 만능 간장은 돈이 적게 들어도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세련되고 단순화된 업그레이드로 깜짝 등장해 반짝 끝나지 않고 오래도록 인기를 누릴 것은 당연지사다.
보통 아이디어 같은데 보통이 아닌 이 아이디어에 뭔가 마법이 있는 듯 계속 끌린다. 하나 안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술, 경쟁력, 시장성 등 다양한 전략이 갖추어진, 시너지가 충분하다.
한참동안 반찬 만들기에 재미를 붙여, 살림살이를 놓고 싶었던 주부의 위기를 극복했다. 최악의 솜씨가 최상으로, 약세가 강세로, 최저가 최고로. 무엇보다 매력인 것은 기초 하나를 익혀 응용력을 넓힐 수 있기에 나 같은 사람에게는 딱 안성맞춤이었던 게다.
그런데 흥행 돌풍은 딱 거기까지였다.
“맛이 똑 같아 질려.”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밑간이 같으니 다양한 재료를 쓰더라도 ‘그 맛이 그 맛’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데는 얼마 가지 않았다. 얕은맛은 사람을 금방 질리게 한다. 그것이 입맛에만 해당될까. 그렇다고 만능 간장의 대가인 요리사 모씨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님을 일러둔다.
만능이 능사가 아닐 줄을 내 짐작은 했건만 이리 쉽게 식상할 줄이야. 만능이란 단어가 ‘그게 그것’ 또는 ‘도긴 개긴’이란 말과 동의어란 말인가.
만능을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봐야겠다. 하이브리드적인 만능이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제 빛깔을 지닌 하나보다 못할 때도 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래도 여러 개를 하나로 묶은 ‘그린 엔 블루’보다 ‘그린 하나만’, ‘블루 하나만’을 더 원하나보다. 다양한 복합성보다 개별적 개성, 뭉텅뭉텅함보다 뚜렷한 하나를 선호한다고 봐야 될까. 만사 통과가 만사 실패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은가. 반짝 컨벤션 효과의 몰이 식 흥행은 안 된다는.
만능맨도 있긴 하다. 다양한 분야에 조금씩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심도 있는 지식이나 깊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나도 잠시 만능 간장으로 한방에 훅 갔지만 되돌아보면 어정쩡한 만능맨과 다름없는 만능 우먼이었다. 한때는 만능 재주꾼을 흉내 내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짠맛이든 싱거운 맛이든 내가 가진, 나다운 맛만이라도 제대로 내야하지 않을까싶다. 금방 싫증나는 얕은맛보다는 오래도록 뭉근하게 깊은 맛을 낼 수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오늘은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우리 가족에게 제 맛을 유지하면서 잘 어우러지는 묘법을 궁리해봐야겠다.
만능시대의 편리성이 사람의 영혼까지는 충족시킬 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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